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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영 '하품은 맛있다'

clint 2026. 5. 1. 12:50

 

 

‘박이경’은 병든 아버지, 기울어버린 가계를 짊어지고 살해 현장을 청소하는 특수 
아르바이트를 한다. 삶에 아무런 감흥이 없이 살아가는 이경은 어느 날 부턴가 
고급 가구들과 명품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 그녀의 일상을 
모두 지켜보는 꿈을 꾼다.
이경은 매일 되풀이되는 꿈속의 그녀가 ‘단아름다운’(다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5개월 전을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 역시 살해 현장을 청소하는 
나를 꿈으로 지켜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매일 살해 현장으로 출근하는 이경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엿보게 된 ‘다운’은 
이경의 몸을 지배해 자신의 끔찍한 과거와 미래를 이경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의식 공유를 넘어 몸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다운과 
이를 기필코 막아내야 하는 이경의 긴장감 넘치는 팽팽한 두뇌싸움이 펼쳐진다.



‘타임슬립(Time-slip)’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로 평생가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인공 ‘박이경’과 ‘단아름다운’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긴장감 있게 풀어 나간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두 여자의 일상이 꿈속에서 얽히며, 상처와 욕망으로 
얼룩진 비밀을 향해가는 이 소설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멈출 수 없는 몰입감으로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5개월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있으며, 오직 꿈을 통해서만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특히, 이경의 시선과 과거를 살고 있는 다운의 세계로
들어간 이경의 시선을 번갈아 묘사한, 기존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교차시점은 
소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포문을 연다

 

 


작가의 말 - 강지영
어린 시절부터 꾸던 기이한 꿈이 있다. 꿈은 내 십대, 삼십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 지 3부작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1부는 이렇다. 나는 창백한 피부에 야윈 몸집을 가진 20세기 초반의 백인 소년이었다. 청각장애가 있어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보이스카우트 대원으로 캠프에 참가했다. 체구에 비해 큰 등짐을 지고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천막을 쳤다. 아이들과 불을 지펴 수프를 끓여 먹고 누군가의 시범을 보며 매듭을 만들기도 했다. 오후엔 호수로 이동했다. 친구들이 수영복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나만, 오직 나만 물가에 어정쩡하게 서서 부표처럼 떠오른 애들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곧 비가 쏟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거친 바위를 등지고 앉아 수영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듣지 못하니 내 이름도 몰랐다. 그저 누군가 내 등이나 팔뚝을 건드리면 고개 를 돌려 상대의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고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근 십 년 동안 나는 이삼 년에 한 번 꼴로 캠핑하는 소년의 꿈을 꿨다.
 2부는 그로부터 세월이 훌쩍 지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버스를 개조해 만든 간이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아주 큰 공원과 오벨리스크가 마주 보이는 장소에 있었다. 단골인 듯 창가에 자리를 잡자 조금 비대한 체형의 내 또래 여자가 주문하지도 않은 커피를 내왔다. 이윽고 토스트와 신문이 내 앞에 놓였고, 나는 특별히 맛있지도 맛 없지도 않은 음식을 아주 느리게 씹으며 신문을 넘겼다. 유리창에 비친 나는 계절에 비 해 조금 더워 보이는 옷을 입은 삼십대 중반으로 보기 싫은 수염과 사마귀를 가진 남자 였다. 
 재작년부터 3부를 꾸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이십대 초반의 딸 그리고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 몇을 데리고 오렌지를 수확하고 있었다. 딸은 붉은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많았고 쇼트 팬츠 차림이었다. 일꾼이라곤 하지만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 애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딸은 남자 애들과 함께 픽업트럭의 짐칸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을 일별하며 들척지근하고 도수가 몹시 높은 술을 한 모금 홀짝 들이켰다. 
 모든 꿈이 그렇듯 맥락도 줄거리도 메시지도 없었다. 나는 먼 과거의 어떤 남자가 되어 무료한 인생의 단면을 하룻밤씩 살고 돌아왔다. 어쩌면 그건 내 전생이거나 혹은 내 가 사랑하는 사람의 전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벨리스크가 선명히 보였으니 공원의 위치를 찾아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두고 싶다. 
 이 작품을 쓰는 내내 독자들을 내 꿈에 초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낭만적인 이야기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이 꿈은 악몽이다. 현실의 내 일부일 수밖에 없는 사악함, 음흉함, 비겁함과 아둔함을 전부 드러냈다. 이제 나는 이경처럼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 202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