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잡한 도시의 남자용 공중변소.
무대 뒤쪽에 똥칸이 넷, 객석을 향하여 무대 앞으로 소변기들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상한 남자(세상을 전복하려는 자들, 간첩이나 현상 수배범을 잡아 팔자를
고쳐 보겠다는 야심에 찬 남자)와 청소부 아줌마(변소의 여왕)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상의 변소 같고 쓰레기 같은 일들이 화장실에서 벌어진다. 이상한 남자의 등장을
시작으로 하는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는 권력에 맛들여 가는 변소 여왕의 등장,
볼일 급한 두 남자의 먼저 차지하기 위한 똥칸 앞에서의 다툼, 자신의 무능함에 지친
술 취한 가장, 습관성 장염 환자와 욕심 없는 남자, 신문광고, 북에 있는 땅 때문에
통일을 기다리는 사람, 안타까운 <그분>, 개구리 몹시 울던 밤 북한강가에서,
한국에 살지 마세요!, 변소의 낙서 그리고 인질극(남존여비의 여존남비化) 등의
장면들로 구성되었다. 연극의 끝은 비밀경찰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출연하여
이 지역은 오염되어 있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위협하고, 이곳에 현재의 모든 상황은
국가 기밀사항이므로 보고들은 모든 것들은 누구도 발설하지 못하게 강요한다.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소독되고, 수색되어지고......
“전부 눈감아! 귀막아, 소리내지 마! 보지 마! 듣지 마! 쉿!, 쉿!, 쉿!......”
소리와 함께 연극은 끝을 맺는다.

이 연극은 굳이 말하자면 <정신환경연극>이다.
이 연극은 오늘 우리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진짜 공해들이 무엇인가를
밝혀보자는 연극이다. 이 사회 전체에 안개처럼 깔려있는 불신, 불안, 불확실,
소외감, 적대감, 사회적 정신분열증, 박탈감, 무관심, 끝없는 욕망, 폭력, 위기주의,
비틀린 성문화, 무한적인 경쟁심, 기준의 실종, 스승의 실종, 냉전 이데올로기의
찌꺼기들, 반 통일 주의, 끝모를 절망감 등이 그것이다.
이 연극의 표현은 비현실적이어서 좀 <이상한 연극>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보는 비현실적 표현일 것이다. 이 연극은 하나의 줄거리를
가지지 않는다. 줄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생각을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이 연극은 각각 독립된 여러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장면이 각각 하나의
짤막 연극으로 완결된다. 그리고 각 독립된 장면들은 하나의 생각으로 통합된다.

여기는 이상한 나라의 어느 번잡한 도시의 남자용 공중변소.
적당한 곳에 화장지 자동판매기, 콘돔 자동판매기, 에이즈 예방포스터. 안기부 간첩 및
좌익사범 신고포스터; 간첩선 최고 1 5억, 간첩 최고 1억원, 좌익사범 최고 3천만 원.
경찰청 주요 현상 수배범 포스터; 수배 범인 당 각 3백만 원. 극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등장 인물들이 무대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버린다. 공연이 끝날 때쯤, 쓰레기 더미다.
비언소(蜚言所)는 '말들이 난무하는 곳'을 뜻하지만, 빨리 발음하면 '변소'가 된다.
작가는 이 둘을 함께 생각했고, 따라서 작품의 무대는 변소이며, 인간들이 토해내는
말의 홍수가 그 내용이다. 물론 작가가 선택한 남자공중변소는 더럽고 무질서한
이 세상의 상징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적나라한 본모습을 내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변소는 연극 무대로서 분명 파격이다. 그러나 그 파격은 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소극(笑劇) 기법과 어우러져 대단히 자유로운 표현을 가능케 한다. 변기에 앉아
외설 연극에 대해 공허한 격론을 벌이는 연극인들. 용무가 급한 상태에서 순서로
벌이는 질서에 대한 토론. 변소에서마저 모든 이들을 의심하는 공안 요원. 역시
빨갱이 콤플렉스에 빠져 헛소리를 늘어놓는 아무개 신부. 원초적으로 소통이 안
되는 남북 회담 참가자들. 다분히 희화화된 이들의 모습은 이미 변소라는 사실
때문에 이완된 관객들에게 시종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최종 목적은 웃음이 아니라, 관객들이 결국 그게 자신과 현실의
모습임을 아프게 인식하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유치한 신문광고나, 북한강변의
음식 및 업소이름의 나열, 또한 화장실 순서다툼, 미사를 보듯 읊조리는 신부의
황당한 말 등은 대단히 재밌고 효과적이다. 평소 직접 경험하면서도 무심했던
대상들을 자연스레 확인하고 놀라는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관객은 연극 시작부터 무대가 공중변소임을 깨닫는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무대가 변소임을 잊어버린다. 연극이 끝나갈 때쯤 관객은 세상이 변소라고
말하는 연극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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