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영무 '탈속'

clint 2025. 9. 11. 05:48

 

 

어느 신문사의 종교담당 기자 한 부장이 등장,

무봉이란 스님이 소개되며 연극이 시작된다.

무봉스님. 그는 천애 고아로 핏덩이 시절부터 채운사의 절밥을 먹기 시작했고

성욕이 강해 수행하는데 애를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봉은 7년간의 면벽수행을 마치고 크게 깨달음을 얻어

무문관을 나선다. 그리하여 그의 공개법회가 이뤄지는데,

그때 무봉스님은 이른바 '침묵설법'을 보여줄 뿐 단 한마디의 법문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의 '침묵 설법'을 두고 종교계에서는 시시비비론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 한 부장은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집요하게 환속승 무봉을 추적한다.

그는 환속 승인 무봉의 방황과 역정을 쫒아 그의 진실을 취재하고자 하나

무봉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결국 무봉은 스스로 얼굴에 화상을 입혀 잠적하고

그 후 다시 채운사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기거한다.

계속 무봉을 추적한 한 부장은 채운사에 찾아와 여기에 무봉이 있다고 하나

그는 다시 사라진다.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들어간 무봉으로부터

일상적인 논리를 찾고자 했던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어느 구도자의  초상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끊임없는 자극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구도자의 초상을 빌어 속세인들의 자기성찰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김영무가 쓰고 강영걸이 연출한 〈탈속〉은 인간적인 욕망이 지극히 강했던 무봉이라는 스님의 환속을 통한 탈속을 추리극의 형식에 담은 종교극이다. 극은 3중 구조로 엮어져 있다. 종교신문의 한 부장과 박 기자가 특종기사를 찾아 채운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재목으로 무봉 스님을 주목하여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극의 틀, 즉 겉의 구조다. 속 구조는 둘로 나눠지는데, 한쪽에선 무봉과 일우 큰스님과의 선문답을 통해 도를 깨우치는 과정이 펼쳐지고, 다른 한 편에선 무봉을 사모하는 안수란이라는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전개된다. 이 복잡한 3중 구조가 채운사와 속세를 오가며 무봉 스님을 추적하는 한 부장과 박 기자의 동기가 연극적인 정당성과 설득력을 확보해서 행동의 통일을 이룩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극은 이 겉 구조에서 가장 큰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특히 한 부장이 무봉 스님을 표적하는 이유가 단순히 신문기자의 기사찾기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한 부장과 함께 일하는 박 기자는 극에서 아무런 기능도 섬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존재이유가 없는 불필요한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차라리 한 부장과 박 기자의 관계로 하여금 무봉과 수란의 관계를 반영하거나 대조토록 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더라면 극의 내면적 의미가 보다 짜임새 있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싶다.   
불교적 진리를 주제 삼은 극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는 실정에서 이제는 스님들을 등장시켜 상투적인 통과의례를 보여줄 것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세속인들을 중심기호로 종교적 주제를 접근해 봄이 어떨지 제안하는 바다. 환속을 통한 탈속보다 탈속을 통한 환속이 더 연극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윤철 연극평론가)

 

 

 

작가의 글 - 김영무

유신론자들은 목숨을 걸고 신()의 존재를 입증해 왔다. 그에 반해서 무신론자들은 수많은 회의적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 들었다. 그들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마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 생각을 돌리고 보면 여기에 또 엄청난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가 존재함으로써 신의 존재 여부를 왈가왈부 할 수가 있다는 것. 그렇지 않겠는가? 가 없는데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말고 란 말인가? 그러니까  속에 별이 있고,  속에 신이 있고 속에 악마가 있고  속에 꽃이 있고  속에 눈물과 사랑이 있는 것이다. 가 곧 소우주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금방 꼬리를 잇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의문! 는 왜 태어났다가 끝내 죽고 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 의문은 불가피하게 나에 대한 탐험의 길도 터주고 있었으니… 「나는 누구인가?」 「 의 정체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나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따라서 이 엄청난 의문을 풀고자 선 수행자가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 수행자들은 를 찾아 길 떠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애를 써서 선 수행자(구도자)의 모습을 추적하고자 했고, 그들의 세계를 넘보고자 했는가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까닭을 갖다 붙힐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연극인 입장에서 나는 '그 속에 분명 근사한 연극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그렇다. 인간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은 자기의 본 얼굴을 잃어 버린지가 이미 오래전이다. 혹은 일상의 가치관 속에 매몰된 우리는 오직 하나의 덧없는 그림자로 구름 같은 삶만을 영위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를 찾아 방황하는 무봉스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자기 자신을 되찾아 보는 연극적인 재미를 발견해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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