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봉기 창극 '전봉준'

clint 2025. 9. 9. 16:51

 

 

형조의 소리: 피고 전봉준을 대전회통형전에 의거하여 사사형에 처하노라. 
개국 오백 사년 삼월 이십구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전봉준의 소리: 의에 일어서서 의에 죽거늘 무슨 여한이 있겠냐만 
나랏일을 생각하니 죽어도 눈을 못 감을 일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이 피를 뿌려줘라.
막이 오르면 전봉준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전 인간평등과 인본사상을 주창한 
그 혁명성으로 지배계급의 거센 탄압을 받고 있던 동학교도, 
그들은 차츰 민족주의 운동으로까지 조직화되어 보은에 수만이 집결하여 
대집회를 연다. 민중들은 보은의 여세를 몰아 서울까지 공격할 것을 
주장하지만 해월은 대포로 무장한 관군에게 저항하느니보단 
훗날을 기약하며 해산을 제안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나 고부군수 조병갑 등 관리들의 폐정과 착취가 나날이 심해져가자 
백성의 절망과 분노를 절감한 전봉준은 결연한 의지로 일어서 의기의
사발통문을 돌리게 된다. 이후 고부 관아 습격의 대열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둔 농민들은 더 진군하자는 강경 발언을 물리치고 해산한다.
그즈음 농민군의 가세에 위협을 느낀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청군의 파병에 명분을 얻은 일본군은 나란히 조선땅에 
황국군대의 집강소 설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선땅에서 외세들의 
전쟁이 벌어지고 일본군이 승리하게 되자 전봉준은 관과 민이 힘을 합쳐 
왜적을 물리칠 때임을 깨닫고 각처에 전령을 급파하여 농민군의 
제2차 봉기를 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동학군 진압에 조선관군을 
선봉으로 내세울 계략을 세우고 공주성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신무기에 밀려 궤멸당하고 전봉준은 체포된다. 
나직한 허밍으로 새야새야가 불리우며 끝난다

 



창극 전봉준은 1988년 동아일보 창극 공모에 당선된 배봉기의 작품이다. 
1988년 심회만 연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었다.
19세기가 저물어가는 1860년대 무렵무터 조선왕조 5백년의 봉건체제는 급격히 쇠퇴하고, 안으로는 부정부패와 무능한 관리의 탐학과 양반토호들의 억압이 그 극에 이르고 연년이 계속되는 흉년은 백성을 도탄속에 헤매이게 했으며, 밖으로는 일본과 청국 아라사등 외세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통제함으로써 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전라도 고부 땅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등 다른 동학도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마침내 반봉건 반외세의 자주정신과 보국안민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무장항쟁에 나선다. 이때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무소불위의 수탈과 학정은 한낱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고종이 톈진 조약을 언급하며 반대하는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고 봉기군 진압을 위해 청군을 불렀다가 조약과 자국민 안전을 명분으로 일본군까지 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정은 다급하게 화의로 태세를 전환했다. 애초에 청군, 일본군과도 싸우기 힘들었고 자신들의 봉기로 외세가 개입해오자 더 이상 싸우기 어려워진 전봉준도 화의에 나선다. 이것이 바로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은 전주 화약 이후 전주성에서 퇴거하여 해산한다. 이후 각지에 농민군이 자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자 전봉준은 관찰사 김학진을 만나 집강소를 공인받고,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뒤 전라좌도의 집강소를 총괄했다. 하지만 집강소가 전봉준의 지시가 아니라 농민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난립하다보니 전봉준도 집강소를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쨌든 전봉준은 김학진과 협력하여 관민상화에 입각한 개혁에 나선다. 이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심이 들끓었고 김개남처럼 재봉기에 나서려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전봉준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재 봉기를 반대했지만 김개남이 먼저 기포하려하자 더는 재 봉기를 늦출 수 없었고, 9월 초에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2차 봉기에 나선다. 이번에는 1차 봉기 때 전봉준에 적대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도 가담하였으며, 전봉준은 논산대회에서 동학농민군의 총대장으로 선출되었고 스스로를 양호창의군의 영수로 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일연합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패배한다. 전봉준은 두 차례나 공주 공략을 시도했지만 모두 막혔고, 1만이 넘던 농민군은 전투가 끝나자 겨우 3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전봉준은 퇴각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아 논산,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배했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여겨 농민군을 해산했고, 전봉준은 체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