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대웅 각색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clint 2025. 5. 14. 07:24

 

 

아름답고 지적인 사촌 록산을 사랑하는 시라노. 
뛰어난 문학성과 검술 실력에도 항상 커다란 코가 콤플렉스였던 
시라노는 자신이 록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잘생긴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서로 첫눈에 반한 걸 알게 된다.
그러던 중 자신의 부족한 문장력에 대한 크리스티앙의 걱정은 
시라노에게 닿고, 시라노는 록산에게 보내는 크리스티앙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기 시작한다. 
시라노가 진심을 담아 쓴 편지들은 록산을 깊이 감동시켜, 
크리스티앙에 대한 록산의 사랑은 점점 커지게 된다.
감동한 록산이 전쟁터로 찾아와 크리스티앙과 극적으로 만나는데 
그 과정에서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편지에 담긴 시라노의 시와 사랑임을 깨닫고 절망한다. 
이에 시라노가 모든 사실을 고백하려는 순간 크리스티앙이 전사하고...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흐른다.
록산은 크리스티앙이 남긴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그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시라노는 그러한 록산을 향한 마음을 감춘 채 그녀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던진 나무에 맞아서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록산은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랑의 편지가 모두 시라노가 쓴 것임을 알게 된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17세기 프랑스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희곡이다. 거칠 것 없고 자긍심 강하며 유쾌하고 호탕한 검사이면서도 철학자이자 시인인 시라노에게는 단 하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사랑하는 록산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 작품은 록산느를 연모하는 잘생긴 크리스티앙 대신 편지를 써주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대필 소동 속에 자신의 감정과 진심을 담아내는 전하지 못한 사랑 이야기다. 이 작품을 통해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 속에서 외적인 매력과 세월을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과 그 지고지순함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며 소중한, 보편적인 가치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2024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해설 발췌 - 드라마터그 박보경
에드몽 로스탕의 1897년작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2024년 극단 여행자의 독특한 스타일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연출가 이대웅이 각색해 연출하여 무대화한 것이다.  희곡은 SF소설의 선구자라 불릴 만큼 빼어난 프랑스 문인이자 자유사상가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모델로 삼는다. 실존했던 시라노가 17세기의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물의 생애와 희곡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있다. 더불어 작품 속 시라노의 시적인 대사들과 코에 대한 과장된 묘사, 대필 편지를 중심으로 극적이고 낭만적인 부분들이 강조된 플롯 구성은 희곡이 저명한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는 어떤 은유를 띠고 당대에 전달되는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게 한다. 역사와 허구의 조화를 통해 강조되는 은유라는 무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가 가진 시대를 넘은 보편성 속에 그들이 사는 세상의 특수성을 스스로 비춰보게 한다. 
극단 여행자는 해외 고전 작품을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바탕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뿐만 아니라 원작 인물의 성별 변화나 배우와 역할간의 의도적 성별 불일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재창작방식도 특징적이다. 작품은 국적과 성별 구분을 넘어(모두 여성이 배역을 맡았다) 원작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사랑과 아름다움의 가능성에 대해 시의성을 가진 더 폭넓은 질문을 던진다. 또한 작품은 극장으로 기능하는 공간과 배우의 역할 수행과정을 전면에 드러내며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허문 역동적 놀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공연을 보는 관객의 자금들이 작품과 감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게 유도한다. 즉, 극중극 형식으로 처리한 장면들이 많다. 

 

 


작품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장면 구성의 아이러니이다. 작품은 깊은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 장면과 웃음을 유발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 등 상반된 특성을 가진 복수의 장면을 동시 진행하거나 한 장면이 다른 장면을 시간차를 두지 않고 덮어쓰게끔 한다. 쉬이 반응하기 힘든 '웃픈 장면들의 향연은 복합적인 감각과 정서를 극대화시키며 형언할 수 없는 풍부한 관극 경험의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이러한 구성은 내면에 콤플렉스와 아픔이 자리하고 있으나 그것이 드러나려는 순간 금세 재치와 선망으로 뒤덮으려는 시라노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연극적 형식으로 치환한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관객 앞에 놓인 작품이 연극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언급은 극이 시작되는 배경이 몽플레리가 주인공을 맡은 연극 '라클로리스가 공연되는 극장'이라는 것을 일러줌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자금 보고 있는 것이 모두 연극의 한 장면이라는 인식을 제공한다. (...) 배우의 연극적 역할 수행과 인물의 사회적 역할 수행의 공간이 일치됨에 따라 통해 관객은 연극의 관객이자 인물의 삶 속 연기에 반응하는 군중이 된다. 구조적으로 무대 공간을 둘러싼 두꺼운 경계 역할을 하고 있는 관객은 때때로 무대위 공간의 폐쇄성과 비좁음을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무대 위 인물의 소외와 아픔에 이입하다가 시야에 관객의 존재와 관람 행위의 모순이 들어오는 순간 관객 자신은 자신이 어떤 아름다움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있는지 그 시선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공연에 출연하는 모든 배우가 여성임에도 록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역할에 부여된 성별이 남성이라는 이질감은 극의 초반부터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편지가 개인간의 주소통 수단이며 기사도 정신이 돋보이던 시기의 묘사와 함께 활용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패러디는 시대의 혼재 속에서 오늘날 이 작품을 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원작은 피상적 평가와 구분을 무효화시키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들여다 볼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각색을 통해 새로 등장한 불편함은 원작이 메시지의 구현 과정에서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점과 뛰어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장벽을 지적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연관된 오늘날의 한 계를 새로이 인식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연극 작품이 특정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종착지이자 정답일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 그로 인해 관객이 주체적 고민을 통해 자신의 삶 속에 작품의 주제를 확장할 수 있게끔 구성하는 것은 작품이 시대를 건너서도 유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점일지 모른다. 작품에서 시라노는 달'에 비유되곤 한다. 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홀로 빛을 내 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시간동안 해의 빛을 온전히 마주하지만, 달은 우러러 볼지라도 그들이 깨어 있고자하는 동안 그 찰나의 파편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시라노를 보던 대중의 시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달을 향해 걸어가는 시라노의 마지막 순간은 남아있는 인물들이 이제껏 존재했으나 그 다층적이고 온전한 모습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달을 더 자주 고개를 들 어바라보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인물들이 영혼과 진심의 존재와 가치를 깨달은 직후 각 자의 배역 또는 연극은 끝난다. 그들이 말한 영혼을 들여다보는 일이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건 연극 밖의 일인 것이다. 극장 밖으로 나선 관객에게도 오늘의 관극이 누군가의 온전한 진심을 바라보려 는 하나의 계기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