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이 오지 마을에 땅굴을 파고 지하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수천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과 그 후예들의 이야기를 다룬
일본어 소설을 원작으로 차범석이 각색하였다.
일본의 죄악사를 폭로하기보다는
극한 상황 속에 처한 인간의 갈등과 욕심을 그리는 작품이다.
차범석씨는 이 작품에 대해 "일본의 죄악사를 폭로하거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학적 관계를 규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지 않고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이기주의의 갈등을 다뤄 이 시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금 묻고자 했다"고 밝혔다.
작가 자신이 일제 때 일본군에 소속돼 제주도에서 방공호 공사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연극평론가 유민영씨는 "화해와 관용에 더 큰 비중을 둔 게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창작극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국외유학연극학 박사 1호인 김창화씨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본을 수정하는 등 새로운 극작술이 도입돼 눈길을 모았다. 이번 작품에는 원로연극배우이자 국립극단 단장인 백성희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말로를 추적하는 후미에 역을 맡으며 징용노무자 출신으로 친일행각을 감춘 채 대기업 회장으로 행세하다 회개하는 강행복 역은 중견배우 권성덕가 담당했다.
실화로 알려진 마쓰시로 地下 땅굴을 소재로 일제패망기에 징용 당한
한국인들에 대한 저들의 학대와 그에 대한 저항, 그리고 親日기회주의자 등
세 측면을 천착한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일제의 비인간성과 그에 대한 저항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2·3세와 親日 기회주의자와의 관계에
맞추고 있는 점이다. 그러니까 피해자의 2세가 아버지 실종의 진상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민족마저 외면한 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한 파렴치한 親日 裸相을
벗긴다. 친일행각을 영원히 숨기기 위해서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태어난
본적까지 고친 뒤 대기업 회장으로 군림하고 있던 친일파는 끝까지 자신의
행적을 위장 변명한다. 피해자 2세의 집요한 추적은 작품의 재미를 돋워주면서
결국 진상이 밝혀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해방 50년이 될 때까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만행과
매국적인 일부 한국인들에 대한 준엄한 告發과 질책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점이
기존 작품들과는 차별된다.
차범석 작가의 글
<안네 프랑크의 장미>란 장미꽃의 한 품종이다. 노란색 꽃으로 화판이 크고 탐스러워 희귀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 길은 없다. 1992년 겨울, 나는 동경에서 우연치 않게 한 권의 책을 얻었다. 일본 여자인 '야마네 마사코'라는 여인이 쓴 '머나먼 여로' 라는 자전수기였다. '야마네 마사코'는 엄밀히 말해서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딸이다. 일본에서 한창 재일교포 북송 문제가 진행되었을 때 그녀도 부모와 함께 '니가타' 항에서 북송선에 올랐다가 출항 직전에 탈출하여 30년 가까이 고아 아닌 고아로 세파에 시달려 나온 자신의 삶을 파헤친 수기였다. 나는 그 책을 읽자마자 그것을 소재로 하여 희곡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 당시 '와세다' 대학원에서 수학 중이던 김순영 군의 주선으로 '야마네' 여사를 직접 만났다. 보다 절실한 얘기를 들었고 희곡을 쓰겠노라 약속을 했다. 따라서 각색이 아닌 창작이었다. '야마네 마사코'의 아버지는 조선 사람이다. 일제 때에 노무자로 징용되어 일본의 중부지방 산악지대인 나가노 현에 있는 '마쓰시로'라는 오지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 작업은 지하 5백 미터 아래에다 새로운 지하도시를 건설하려는 작업이었다. 그곳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일본 천황과 황족들의 피신처와 육군 대본영, 그리고 중요한 국가기관이 들어설 일대 역사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백일하에 알려진 것은 패전 후였고 그것도 일본정부 측으로서는 되도록 보도관제로 세상의 이목을 막았던 까닭에 일반인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노동판에 무려 1만 명의 조선인 노무자와 그 가족이 죽지 못해 살았었던 처참한 삶의 현장이다. 그런 사실을 우리는 까맣게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 지하작업장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사건들은 일본사람들 자신도 전혀 알 길이 없어 망각의 저편으로 버려 진 곳이기도 했다. 나는 '야마네 마사코'의 안내로 아내와 함께 현지답사를 갔었다. 그리고 그 시실은 아사히신문에 기자와의 인터뷰와 함께 사진도 크게 실렸었다. 나는 이 처절하고도 숨 막힌 민족적인 비극과 일본과 한국의 어쩔 수 없었던 과거사를 재조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단순논리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차원에서 재음미 하려고 뜻을 굳혔다. 1992년 9월, 국립극단의 152회 공연작품(문고헌 연출)으로 햇빛을 보았건만 관객의 시선은 냉담했었다. 내 판단이 어리석었거나 아니면 관객의 무지였거나 둘 가운데 하나가 그 원인이었을 게다. 그러나 오늘날 한일 문화교류가 본격화되었고 남북통일의 물꼬가 트인 시점에서 볼 때 나는 나의 작은 시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고 또 그것은 언젠간 딛고 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희곡 「안네 프랑크의 장미』는 나에게는 소중한 한 송이 꽃이기도 하다.
(야마네 마사코- 원작자의 말)
"(⋯) 마쓰시로(松代)는 일본 나가노 현 북부에 위치하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입 니다. 이곳에 1944년 가을 일본 천황과 대본영이 이전할 지하호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300동이 넘는 한바에서 내가 살았던 집은 판자집이었습니다. 일본 사람인 어머니와 한국사람인 아버지를 가진 나는 이유 없는 차별과 모델을 수없이 받아왔습니다. (⋯) <안네의 일기>는 세계 각나라에서 읽혔고, 단 한사람 살아남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그 은신처 뒷뜰에 피었던 장미에다 사랑하는 딸의 이름을 따서 '안네 프랑크의 장미'라고 작명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의 장미'라는 뜻입니다. 마쓰시로의 한바에도 그 장미가 싶어졌습니다. 그 <안네 프랑크의 장미>는 1991년 서울의 뜰에도 옮겨 심었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 박창희 교수댁의 화단에 지금도 그 평화의 장미는 자라고 있습니다. 몇해 후 안네의말을 따라 시샘이라도 하듯 피어날 그 날이 바로 새로운 한국과 일본의 우호관계가 이어지리라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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