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유진월 ‘연인들의 유토피아’

clint 2025. 5. 3. 08:55

 

 

한 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보낸 메일 봤어… 사랑한다고 써져 있더라.” 

‘여자’의 말을 들어보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듯하다. 
‘여자’와 같이 등장하는 ‘남자’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우리, 무엇으로 이 긴 세월을 살아 온 걸까?” 
결혼생활의 권태로움에 질식된 남자가 여자 몰래 외도한다고 
관객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또 한 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가난한 부부가 되는 상상하며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다. 그들의 밝은 모습을 보는 
관객들은 곧 다가올 행복을 예감하는데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당신은 또 하나의 세상인 거야, 유토피아처럼”이라고 
속삭이는 ‘그’를 밀어내는 ‘그녀’의 말. 
“유토피아? 그건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인데….”

이 두 쌍의 남녀는 각각 번갈아가면서 등장한다. 
같이 손을 맞잡으며 웃는 그와 그녀의 무대는 유연하다. 
반면 남자와 여자의 무대는 어딘가 이상하다. 대화는 겉돌며 
무대에 등장하는 둘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네 명의 남녀가 모두 등장하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것도 세게. 

 

 

 

유토피아... 사전적 의미로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 아래 있는 이상 사회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데도 없는' (nowhere)이라는 의미였다.

'연인들의 유토피아'는 결혼을 앞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인해 결혼을 꿈꾸는지, 현실의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작품이다. 연극 연인들의 유토피아는 두 쌍의 부부와 그 안의 한 쌍의 연인이 등장하여 30대의 정열적인 사랑과 안정적인 결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 속에서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작품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또 누구나 꿈꾸는 마치 하나의 유토피아와도 같은 그런 사랑, 하지만 그 유토피아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이 작품은 마치 여름의 열정 같은 치열한 사랑의 이야기로 사랑과 생, 무거운 상실과 고독을 통해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그려나간다. 익숙함에 지쳐 서로의 존재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연인들, 결혼을 앞둔 연인들에게 스스로의 사랑에 관해 자문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표면상으로 나와 있는 '연애'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외로운 인간과 인간이 '소통'을 통해서 고독에서 벗어나보려고 애쓰는 과정 중의 한 방편이다. '그녀'는 연애라는 낭만적 소통의 방식을 선택하지만 그것이 유치하고 무책임하며 무모하고 깊이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고독의 근원적인 치유가 될 수 없음은 물론 여전히 혹은 더 깊은 고독의 자리에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오히려 그토록 진부해보이던 결혼이라는 제도가 의무적이고 상투적이지만 그래서 더 확신에 차고 완강한 방식으로 고독을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듯 보이는 인물들도 잘 정리된 그 제도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랑과 결혼과 남편에 대한 '여자'의 확신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그런 아내와 사는 '그' 또한 행복하다. 불확 실성으로 가득찬 거짓과 모순의 세계에 서로 사랑하고 위로할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서로 간에 사랑도 믿음도 없는 '그녀'와 '남자'의 결혼생활은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없다. 처음에 그러했듯이 끝까지 각자 고독하게 남을 뿐이다. 자신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던지지 않고서 무엇인들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떠난 아내를 그토록 담담하고 침착하게 보내는 남자의 자세 어디에 함께한 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가. 세련되고 현대적인 태도로 포장된 냉랭함이 있을 뿐이다. 결혼에 대해 이미 기대감을 상실한 그녀는 연애라는 소통방식에 대해 잠시 희망을 갖지만 더욱 외로운 자리에 떨어져 있는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사실 산다는 것은 본래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구원해줄 수 없는 지독하게 쓸쓸한 것이다. 아득한 낭떠러지로 곧 떨어지고 말 것을 알면서도 잠시 구원의 꿈을 가져보는 것이 산다는 것의 절망적인 희망이다. 죽을 힘을 다해 밀고 올라온 바위가 곧 다시 떨어지는 것을 내려다볼 때의 절망, 차라리 그 바위와 함께 떨어져버리면 다시는 희망 같은 걸 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완전한 절망 거기에는 고독이나 사랑 따위의 가슴 시리게 쓸쓸한 단어는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  - 유진월 

작가의 말 쓰기가 작품 쓰기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런 저런 글을 썼지만 부족한 작품에 대한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지 싶어 다 그만두었다. 자기 앞의 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며 결단을 요구하는 엄숙한 일이라는 것, 그 선택의 결과는 오로지 자신이 지고가야 한다는 것, 기쁨과 행복뿐 아니라 고통과 불행 속에서도 삶은 무언가를 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한 걸음씩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말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치열한 열정의 시기인 "여름의 연인의 이야기로 사랑과 생의 무게만큼이나 상실과 고독도 무겁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사랑의 기쁨에 겨워하기보다는 안으로 깊이 가라앉아 외로운 자신의 맨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는 쓸쓸한 일인 모양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답고 미더운 이름 <산울림>과 함께 하게 해주신 임영웅 선생님과 오증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공연을 위해 오랫동안 애를 쓴 김진만 연출과 배우와 스텝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모든 분들께 오래도록 마음으로나마 나누어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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