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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 '자유종'

clint 2025. 3. 23. 06:26

 

 

이 작품의 배경은 1908년 음력 1월 16일 밤 이매경 여사의 집이다.

등장하는 인물은 신설헌, 이매경, 홍국란, 강금운 등 네 사람이다.

이 가운데에서 신설헌 부인이 사회격으로 제일 먼저 토론회를 제의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녀는 먼저 구시대의 유습인 여성의 인종(忍從)과 예속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는 여성 역시 새 시대의 의미, 국가와 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신설헌 여사의 말로 토론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여권(女權) 문제와 교육을

통한 개화·계몽, 국가 사회의 부강·자주책, 미신 및 계급·지방색 타파 등에 미친다.

먼저 여권 문제에 대해서는 남자가 절대 지배권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폐습이

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교육, 계몽이 부국 강병과 새 사회 건설의

필수요건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상숭배나 윤리 도덕정신을 앙양하는 제사, 관혼 등

길사가 오로지 형식에 치우치고 있는 폐단도 시정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한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2세 국민들의 교육에 대해서 진지한 의견들이 펼쳐진다.

여기에서는 지난날의 부모 우선주의가 철폐되어야 할 과제로 제기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자녀 공물론'이다. 다음으로 사회 개혁과 부국 강병의

실현을 위해서 거론된 것은 신분간의 문제점 해소와 계층간의 난점 해소 방책 등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적서(嫡庶)의 그릇된 인식과 차별의 폐지가 주장되었다.

그에 따르면 인재 등용은 국익에 비추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가 부당하게 서북출신을 백안시했던 풍조를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바닥에 깔린 주제 의식은 신설헌 부인이 제시하는 말로

총괄된다. 이매경 여사는 꿈 이야기를 빌어서 자신이 꿈꾸는 우리 사회의

이상적 건설 상태를 피력한다.

 

 

 

자유종 신소설이란 표제를 달고 있지만 대화로만 구성된 독특한 양식이다. ‘신소설이라는 표제하에 어떤 실험까지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경우라 하겠다. 양반가 부인들이 발화의 주체로, 이매경이라는 부인의 생일잔치 날 이매경 외 신설헌 · 홍국란 · 강금운 등이 각자 돌아가며 사회와 가정의 개혁 방안에 대해 소회를 밝힌다는 형식이다

자유종에 등장하는 네 명의 부인이 각자 두어 차례씩 돌아가며 교육의 필요와 개혁의 방책, 그리고 대한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토로하는데 대화의 대부분은 교육의 필요와 가정교육의 중요성 등 누구나 동의할 만한 내용을 축으로 하고 있으나, 중간중간 논쟁에 가까운 대립선이 보이는 대목도 있다. 여성이 사회적 의제에 대해 논한다는 점도, 각기 제 이름으로써 불릴 정도의 존재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특이하다. 실제로 자유종에서 논의되고 있는 폭은 한문 전폐와 계급 폐지를 아우를 정도로 넓다. 화답과 논쟁이라는 방식이 고루 쓰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자유종에서 논의된바 국문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 사회의 수립이 먼저냐 개인의 도야가 먼저냐는 등의 논점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예컨대 금운이 중국 글을 일체 폐지하자는 데 대해 국란은 한문 전폐는 불가하다며 반대한다. 오랫동안 살던 집을 남의 집이라 하여 졸지에 세간즙물 다 두고 몸만 나오면 어찌 살겠느냐는 것이 국란의 비유다. 그런가 하면 국란이 곳곳에서 이런저런 사회’, 즉 단체를 만들지만 좋은 효과보다 폐가 된 많은 상황이라고 비판하는 데 맞서 설헌은 그래도 단체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섣불리 조직 만들고 사업 벌이느니 개인마다 직분에 충실한 편이 낫다는 것이 국란의 주장이라면 설헌은 그런 소극적 직분론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입장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국가 ·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자유종은 한편 일관되게 여성 교육의 필요를 강조한다. 1910년이라는 시점에 여성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국가나 사회 등 다른 주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자유종 1910 7, 일본에 의한 강점 직전에 출간된 책이다.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가 시작된 후 1913년에 금서가 되었다. 이해조의 저작 대부분이 신문 연재를 거친 데 비해 이 책은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