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성의<망나니>(1969,9)는 60년대 들어와서 시작된 전통 탈놀이의 복원운동과 그 현대적인 계승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룩한 작품이다. 연극의 놀이화·개방적인 변신극(變身劇)이라는 기본형에서 이 작품은 탈놀이를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대놀이 일부의 삽입·춤사위·장단·재담술에서 탈놀이의 방법을 광범위하게 차용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서구적인 비극방법과 조화되었다.
마당귀신인 고석할미는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가고있으며, 죽음이야말로 삶의 고통과 고난을 잊게 하는 안식임을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노승은 삶은 희망을 향해 가고 있으며 희망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삶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두 노인은 이러한 논쟁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내기를 건다. 두 노인은 한 나무꾼 아이를 4백년 전으로 거슬려 보내면서 과거의 인간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가면을 씌운다. 아이가 일단 탈을 얼굴에 쓰자 벗겨지지 않는다. 아이는 조선조 중기의 어느 양반집 종인 마당쇠로 환생된다. 양반인 주인은 정여립난의 공모자로 모함되어 사형을 받게 되고, 그 부인 역시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낳은 직후 남편의 뒤를 이어 사약을 받게 된다. 양반의 후예는 피천수라는 이름으로 마당쇠와 여종인 용녀에 의해 성장한다. 마당쇠와 용녀부부는 피천수를 안전하게 기르기 위해 가문과 신분을 속이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피천수는 퇴기의 딸인 계영과 부부가 되고 눈먼 딸을 낳게 된다. 천수는 일찍이 용녀를 잃고 마당쇠와 가족을 거느리고 임진왜란을 피해 부모가 그러했듯이 여러 고장을 방랑한다. 어느날 피천수는 도적의 누명을 쓰고 관군에 잡히게 된다. 피천수는 누명을 벗는 조건으로 망나니가 되며, 계영은 명나라 장수 조문룡의 첩으로 이끌려 간다. 망나니가 된 천수는 날이 갈수록 직업에 대한 갈등이 망각되면서 칼 질에 익숙해진다. 한편 계영은 첩이 된 것을 괴로워하다 조문룡을 죽이게 되고 관군에 잡히게 된다. 계영의 사형 집행날, 천수는 아내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해지자 눈먼 딸을 아비에게 부탁하고 아내 뒤를 따라 자결한다.
망나니는 60년대 들어와서 시작된 전통적 탈놀이의 재건운동과 그 현대적 계승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 우리의 역사극은 항시 소재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 상투적인 경향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상투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돋보인다. 작품 속에서 역사적인 소재는 주제를 살리기 위한, 극히 제한적인 범위에서 차용되었다. 잡다한 과거 사건이나 배경설명은 제외되었다. 다음으로 주제의 철학적인 접근을 지적할 수 있다. 삶이 공유하고 있는 희망과 절망, 꿈과 좌절의 갈등 내지는 불가피한 운명과 죽음의 의미 등을 추구하였다. … 세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형식의 새로움이다. 구태의연한 자연주의적 방법에서 우리의 역사극이 방황하고 있을 때 작가 윤대성은 과감하게 전통적인 방법을 차용하여 리얼리즘 연극과의 접합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망나니>는 저 그리스의 운명비극을 방불케 하는 작품이다. 양반의 후손으로서 불가피하게 사형인인 망나니로 전략된 한 남성이 불가항력으로 그 아내를 죽여야 했던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사건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불가피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이나 숙명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작품을 운명비극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까닭은 사태의 불가피성이 신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여건에 따라 결정되어 가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회적, 역사적 요인의 가변성을 전제로 한다면 오히려 사회비극 역사비극적 성격이 짙다고 하겠다. 이러한 성격과 아울러<망나나>의 기본적 구조를 이루는 틀은 내기와 변신놀이가 근간이 되는 탈놀이 형식의 절충이다. 이를테면 서구적인 비극과 민속극의 유희성을 접합, 절충 시키고자 한 시도가 역력하다고 하겠다.
던져진 「나」의 재발견 - 윤대성 작가
거의 3년동안은 방황이었다. 내겐 글을 쓴다는 작업이 점차 역겨운 고통이 되고 있었다. 나는 항상 미흡하기만한 원고뭉치들을 붙안고 울면서 밤을 새울 때가 많아졌다. 그리곤 언제나 내 곁에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또 실망해야 했다. 그리하여 언제나 내겐 다시 시작하는 작업만이 되풀이 되곤 했었지....
그러다가 지난 2월이었는가? 내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여러 사건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나」-「우리」를 재발견했다. 여지껏 내 좁은 생활주변에서만 맴돌던 나는 거슬러 역사속에 비약, 거기에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너무나 할 얘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얘기를 담을 훌륭한 그릇도 발견해 내었다. 그래서 그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망나니」다. 오랜 진통속에서 드디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의 연극은 마당에서 출발하였다. 단오날밤, 원님의 생일잔치 또는 중국사신을 영접할 때 일정한 무대장치도 배경도 막도 없이 촌락의 광장 대감집 안마당 또는 궁정의 뒤뜰에서 모닥불을 밝힌 채 춤추고 노래하며 광대들의 익살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 광대들은 탈을 씀으로서 이미 현실의 인물이 아닌 성격으로 변형되어 시대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마구 놀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새삼 이 민속극의 전통을 계승하는 작업을 시작했노라고 감히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우리 민속 본래의 연극형식을 빌어 오려고 애썼으며 최소한도나마 몇 등장인물에 탈을 씌워 보았고 또한 우리의 음악과 무용을 연극 중에 도입하는 노력을 시도해 보았다. 전12장으로 나눈 것도 굳이 이유를 붙인다면 우리의 열두마당을 연상한 것이다. 한국 민속극의 전통적 내용은 서민생활의 애환, 지배계급에 대한 풍자, 그리고 극히 극소지만 저항을 내포하 고 있다. 어디까지나 서민이 주인공인 점에 한국 민속극의 특질이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온갖 고난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우리 민족의 비극을 역사에 비춰 그려보았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왕도 왕자도 대신들도 아닌 서민들이다. 이들이 겪은 고난의 얘기야 말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나는 종래에 없던 새로운 내용, 새로운 형식의 史劇(엄격한 의미에선 사극이 아니다.)을 시도해본 셈이다. 나의 이 조그만 노력이 전통이란 문 제 때문에 번민하는 연극인들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된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겠다. 끝으로 이 작품을 위해 자료제공을 해준 여러 선생께 감사드린다. 이 분들의 도움없이 <망나니>가 빛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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