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재판장면이 나온다.
1945년. 권중섭의 부친이 해방 전 공산주의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고
기소되어 3년형을 받는다. 이때가 주인공 권중섭이 태어난 직후이다.
6. 25동란으로 휴전 등 혼란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13살 무렵에 서울로 상경한다.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한다.
그러나 어려웠던 때인지라 여러 일을 해보며 세상을 체험한다.
4. 19도 거치고 5. 16도 겪는다.
포장마차도, 양복 빼입고 월부책장사도 해보나... 오래 못하고...
그리고 청계천의 조그만 회사에 들어간다. 삼정물산.
수출회사인데, 수출장려 정책에 잘 맞아 조그만 회사가 쑥쑥 큰다.
그래서 결혼도 했고, 조그만 집도, 애들도 있다.
10여년 넘게 회사에 다니고 회사가 빌딩을 지어 이전할 정도이고
초창기 멤버들은 전부 중역급이다.
박통의 궁정동 사건도 재현하며 지나가고
서울의 봄이 광주사태와 어울려 갑자기 겨울이 된다.
어느덧 권중섭도 중역이다. 술상무. 구변이 좋은 그는 처음엔 잘나갔다.
그러나 술먹고 떠드는 소리가 회사나 접대상대에게 불편을 주기 시작하고...
그리고 민주화 시위에 우연히 끼어들어 같이 과격행동을 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구속된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무엇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지요? 재판장님! 그 이유를 밝혀주십시요.
하늘아래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습니까? 난 바보처럼 살아왔고 바보입니다.
바보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팔뜨기 눈알이 제대로 돌아와야겠는데
당신들의 눈알은 정상인 줄 아십니까? 나는 보았습니다.
핏줄을 자르고 땅이 굽어지고 한이 맺힌 하늘아래서 괴이한 기인들만이
서식하는 것을 보았지요. 나도 44년을 파행적으로 살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끝장내어야 합니다. 끊어진 것을 이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꾸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들도 사팔뜨기요.
남쪽이든 북쪽이든 우린 모두 달밤에 육갑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는다.
권병길이 쓰고 연출하고 모노드라마로 연기까지 하기에
권병길의 인생사를 엮은 게 아닌가 생각했으나 (게다가 주인공도 권씨)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큰 줄기에 한 남자가 겪게되는 모순적인 삶을
이 모노드라마 <거꾸로 사는 세상>에서 보여준 것이다.
권병길은 서라벌 고교에서부터 연극을 시작해 바로 극단에 들어가
평생 연극만 해온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50이 넘어 영화도 출연함)
권병길(權炳吉, 1946~2023)은 1968년 차범석(작) 박완서(연출) “불모지”로 연극계에 데뷔했으며, 무엇이 될꼬 하니(1978), 족보(1981), 거꾸로 사는 세상 1일극(1988), 동키호테(1991), 햄릿(1993), 꽃물 그리고 바람의 노래(2014) 등 100여 편의 작품 출연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그때 그 사람들, 공공의 적, 식객 등 30여 편의 영화와 공룡선생, 종이학, 어른들은 몰라요 등 다수의 TV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일본과 네덜란드 공연으로 주머니 속의 탱고(1979) , 프랑스 NANCY세계연극제(1983), 튜니지아 하마메트 국제연극페스티벌(1983), 스페인 바로셀로나, 말라가 페스티벌(1984), 독일에서 햄릿(1994) 등 많은 해외 초청공연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연극제 신인 연기상(1981) 수상을 비롯하여 올해의 연기자 선정 연출가 그룹상과 서울연극제 연기상(1995) 수상, 동아연극상 연기자상(1996), 국제극예술협회 영화연극상(2003), 최우수예술가상(2010), 연극을 빛낸 사람(2017) 등을 수상함.
권병길 50주년기념 2번째 모노드라마 “푸른별의 노래”를 2018년 공연함. 2023년 77세의 나이로 운명함.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광화 '여자의 적들' (2) | 2024.12.01 |
---|---|
조성현 '사랑이 가기 전에' (4) | 2024.12.01 |
공동창작 '심봉사 코끼리를 보다' (3) | 2024.11.30 |
뮤지컬 '바람의 나라' (4) | 2024.11.29 |
박노해 원작 시 '노동의 새벽' (4) | 2024.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