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정 '여자, 마흔'

clint 2024. 8. 26. 09:12

 

<여자, 서른>이후 10년 만에 무대 위로 돌아온 
배우 이혜지의 두 번째 모노드라마 〈여자, 마흔〉!
<여자, 서른>은 최기우 작가가 쓴 작품이고
<여자, 마흔>은 최정 작가의 작품이다. - 10년 터울로 
각각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한 배우가 공연하는 건 처음일 듯하다. 
또 다른 작가가 쓴 <여자, 오십>도 기대된다.
전편과 달리 여성 작가라 그런지 세심하며 리얼하다.

 



〈방구석 라디오〉 On Air! 자, 이제 시작합니다.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만들어가는 그녀의 이야기로 
특별히 생방송이라 더 리얼한 마흔의 그녀의 좌충우돌을 본다.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여성이자 육아맘, 
그리고 '어쩌다 어른‘이 된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로
마흔의 그녀가 건네는 걸쭉한 수다와 따뜻한 위로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고느끼는 작품이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툰 모양. 여자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았다. 아이에게 전화를 건다. 글쎄 이 녀석은 또 학원을 안 간댄다. 여자의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 더 생긴다. 아이를 실컷 어르고 달래놓은 후 여자는 신고 있던 단화에서 굽 있는 뾰족구두로 옮겨 탄다. 이제 ‘준후 엄마’에서 ‘인기 라디오 DJ 하소연’으로 변신할 때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결혼과 출산을 거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경력단절녀’로 불렸던 지난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화려한 복직을 신고했건만 생방송 10분도 안 남은 시점에 작가는 행방불명, 대본도 없이 생방송을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오프닝만 어떻게 해보자”며 녹슬지 않은 임기응변으로 선보이고 “봤지? 내 실력” 외치며 한숨 돌리려는데. 아뿔싸, 학원 안 간다던 큰 아이 준후가 아무래도 가출을 한 것 같다. 그 확신에 불을 붙이듯 아이를 납치했다는 협박전화까지 걸려온다.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하소연의 머릿속은 시커멓게 타버린다. 

 

 


인생을 살다보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넘어가고 싶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마음대로 늘리고 줄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여기,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시간을 멈추고 싶은 하소연에게도 마찬가지. ‘인기 라디오 DJ’의 복귀를 알리는 생방송을 이끌어가랴 ‘준후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 찾으랴, 하소연은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가는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제발’을 외치며 홀로 고군분투한다. 전화를 받으라는 남편은 감감무소식이고, 별안간 전화를 걸어온 친정엄마는 ‘밥 먹었니’ 라며 한가한 말씀만 하시니, 하소연은 애꿎은 엄마에게 화풀이를 한다.
“생방송은 리허설이 없으니까, 우리 인생처럼.” 그래도 라디오 생방송은 이어진다. ‘내 마음의 처방전’ 코너에서는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오면서 ‘나’를 잃어버린 한 여자의 사연이 소개된다. 하소연은 꿈과 열정만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리즈시절’로 잠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다. 무릎 꿇은 채 떨리는 두손으로 꽃다발을 주며 프러포즈했던 남편, 그 앞에서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던 젊은 날의 하소연.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며 온몸으로 행복을 노래했던 시절이 있었다. 우는 아이를 안고도 어찌할 바를 몰라 “미안해”만 수없이 읊조리며 지새웠던 숱한 밤들도 있었다.

 

관객 중에 남녀가 불려나와 같이 연기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서로 구속해 안달이야.”
노래 ‘화려한 싱글’을 들으며 하소연은 현실로 되돌아온다. 아이의 실종 소동은 남편이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일단락된다. “지금 준우 데리고 가고 있다”며 남편이 보낸 사진 속엔 그토록 찾았던 아들이 제 아빠와 얼굴을 맞대고 환하게 웃고 있다.
“지금까지 하소연의 긴 수다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ON AIR 불이 꺼지고 높은 구두에서 낮은 신발로 갈아 신은 하소연. 그때 저쪽 문에서 “엄마”하며 한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긴다. 하소연은 준우의 손을 잡고 두 아이의 엄마로, 생방송을 멋지게 마친 인기 라디오 DJ로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한다.

 



두 시간, 길고도 짧은 시간 하소연은 20대 꿈 많은 아가씨였다가, 한 남자의 아내였다가, 두 아이의 엄마였다가, 경력단절로 고민하는 40대 여성이었다가, 인기와 실력을 겸비한 라디오 DJ였다가, 살갑지 못한 딸이었다. 공자 왈 40세는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불혹(不惑)이라 했던가. ‘여자, 마흔’에서는 흔들리는 마흔이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제법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 흔들리는 거라고. 10년 만에 돌아온 이혜지 모노드라마 ‘여자, 마흔’은 마흔의 그녀가 ‘어쩌다 어른’이 된 우리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응원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