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릴케 원작 김승철 재창작 '전야제'

clint 2024. 8. 16. 08:59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건물 지하의 극단 연습실.

곰팡내가 진득거리며 몸에 달라붙는 정돈 안 된 실내. 한쪽 벽에 빼곡히

걸린 의상들이 인상적이다.

정전으로 어둠이 점령한 연습실.

그 맹목(盲目)의 공간에서 일곱 명의 배우들이 공연 뒤풀이를 벌인다.

그들은 공연 기간 중 말도 없이 사라진 채 행방이 묘연한 연출을 성토하며,

오랜 극단 생활을 통해 쌓인 서로의 불만들을 토로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숨겨두었던 개인사, 단원들 간의 내밀한 관계들,

알려지지 않았던 추악한 사연들이 밝혀지며,

그들의 어둠 속 공연 뒤풀이는 서로의 치부들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술과 함께 점차 광기 어린 한바탕 난장으로 치닫는다.

그러던 순간, 정전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연습실엔 전등이 밝혀지는데 ….

 

‘전야제’는 극의 말미에 극적 반전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전야제’는 연극의 마지막 5분을 통해 관객들의 인식의 확장을 도모하며,

동시에 극의 주제를 실존적 문제의식의 틀로 연계, 승화시킨다.

어둠 속에서 벌이는 죽음의 전야제이며 서로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배우들의 광기어린 한바탕 난장 훔쳐보기이다. 

 

 

 

‘전야제’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깊은 밤에 정전인 상황에서 벌어진다. 따라서 배우들은 어둠 속에 처한 등장인물들을 연기한다. 허나 무대의 조명은 실재와 반대로 운영된다. 즉 정전인 상황에서는 무대의 조명은 환히 밝혀지고, 그 반대인 상황에서는 조명이 꺼져 무대는 깜깜해진다. (피터 셰퍼의 <블랙코미디>처럼) 결국 관객들은 어둠 속에 숨어서 벌이는 등장인물들의 온갖 추악하고 또 때로는 눈물겹도록 진실한 모습들을 환한 무대를 통해 적나라하게 훔쳐보게 되는 것이다. 어둠에 가려 나의 행동이나 표정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과연 인간들은 그 안에서 어떤 진실한 모습들을 드러낼 것인가? 타인의 눈을 의식할 경우에 인간들의 행동은 또 얼마나 다르게 드러나는 것일까? 

 

‘전야제’는 극중극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중에 벌어진 사건이 극중극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그 인물을 연기하는 실재 배우들의 실명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극에 등장하는 연출이나 조연출의 이름은 실재전야제공연의 연출, 조연출의 이름을 쓴다. 이는, 관객들이 공연을 보며, 혹은 프로그램에 실린 배우와 스태프들의 이름을 확인하며 연극과 현실,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흐려지도록 유도하기 위한 연극적 장치들이다. 극의 내용이 연극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다룬 것처럼, 작품전야제가 곧 관객들의 현실에 다름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극작가로서의 릴케와 그의 '전야제'

삶과 죽음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 릴케의 희곡 '전야제' 1896년에 쓴 작품이다.

작품에는 대학생들인 세 쌍의 젊은 연인들이 등장하는데, 지난 저녁 파티의 열정을 차마 떨치지 못하고 프리츠라는 인물의 집으로 몰려온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축제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가는 젊은 남녀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환희와 발랄함,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축제에 대한 기대 등의 모습에 어머니라는 또 다른 세대의 암시된 죽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작품 진행 내내 무대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 속에서 젊은 남녀들은 인생의 불투명함만큼이나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죽음이 이미 그들의 파티장에 도착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방에 불이 밝혀지고 내내 같은 공간에 있던 프리츠 어머니의 주검이 확인되자, 생의 환희에 타올랐던 파티장은 순식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으로 돌변한다. 죽음은 이미 그들의 축제를,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창작 및 연출의 글 - 김승철

인생은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한바탕 난장은 아닌가. 릴케는 젊은 날에 습작처럼 쓴 20분 분량의 희곡전야제에서 당시의 젊은 대학생들을 등장시켜 세기말의 난장을 말하려 했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오늘날의 난장을 읽는다. 전야제 21세기에 벌이는죽음의 전야제이다. 실존적 비극은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의 상실에 근거하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인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한 채 수많은 타인들과 얽힌 갈등의 굴레에 감겨 저마다의 욕망에 몸부림치고 난투를 벌이며 생의 대부분을 흘려보낸다. 그런 시간들의 끝에는 바로 누구든 맞이하게 될 죽음이 팔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런 게 인간이고 인생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곁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직시한다면, 어쩌면 조금은 삶의 의미가 다르게 비추일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