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구레이 '날개 달린 두약'

clint 2024. 8. 13. 22:14

 

 

남편의 상중이지만 75세 모친에게는 죽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정도,

애도의 마음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문객이 피워대는 향 연기는

눈물 콧물을 유발하여 불편한데다 실금의 원인이 되기만 한다.

또 거동이 불편하여 화장실 가기도 힘들어서 요강을 써야 하는 처지이다.

그런 와중에도 모친은 조문객들의 부의금 봉투는 살뜰하게 챙기면서

수지타산에나 골몰한다. 한술 더 떠서 남편의 장례가 끝나면

새 생활을 시작할 꿈에 부풀어 오른다.

당연히 아들은 모친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하고,

모친은 죽은 남편을 빼다 박은 아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렇게 하여 숨겨진 가정사의 비밀이, 부부 사이를 서로 넌덜머리나는

원수지간이 되게 만든 그 사건이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의 모친과 아들의 사이도 만만치 않아서, 상대방의 아픈 곳을 정확하게 공격하고 가혹하게 후벼 판다. 하지만 <날개 달린 두약>은 초점을 관계나 갈등 보다는 모친, 즉 방두약 자신에 맞춘다. 바로 방두약 본인이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살아온 나날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친과 그 분이 겪어온 세월에 바치는 시"라고 작가는 말한다

젊은 시절 방두약의 화려했던 나날들이 펼쳐지는 후반부의 전개는 다소 난해하다. 뇌경색이 악화된 모친의 환각과 현실이 겹쳐지는 가운데, 스토리는 두 가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하나는 젊은 방두약의 춤, 친구들, 딸의 죽음, 그리고 남편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아이가 읽어주는 소설 속 노인과 모친의 오버랩이다. 환각과 현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소설과 현실이 모든 것들이 켜켜이 뒤섞여 흘러가는 서사의 가닥을 잡아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너무나 순박해서 아름답고 숭고한 이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망가져버린 가족과 관계들을 복구하기 위해, 자기가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해주었던 바로 그것까지도 포기하며,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자 했던 모친의 결심과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작품 후반부에서 모친의 죽은 딸 나용용이, 그리고 나생의 딸 나소우가 열심히 읽는 이야기는 노벨상 수상 작가로 남미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지은 단편소설 <날개 달린 노인>이다. 이 소설은 국내에서 이 제목 말고도 <거대한 날개를 가진 노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구레이의 이 작품 제목도 이 소설로부터 온 것인데, 중국어 원제목을 따라 이 번역의 제목도 <날개 달린 두약>이라고 붙이게 되었다. 이 작품에 인용된 부분도 국내 번역본과 구레이의 원문을 적절히 절충하였음을 밝혀둔다.

한 가지 추가할 설명은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 즉 모친 방두약과 그 자매들의 이름들, 두약, 부용, 약영, 신이미 등등은 모두 중국문학의 시조인 시경(詩經)이나 초사(의 싯귀에 등장하는 고대 중국의 꽃이나 식물 이름을 사용하였다. 연유를 물었더 니 이 작품 구상할 때 어린 아들한테 시경과 초사 읽어주고 있었다는 대답과 함께, 실제로 그 시절 여성들의 이름에 꽃이름이 많이 들어갔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난초(), 매화(), 국화() 등등. 여성의 이름에도 꽃을 바치는 미풍양속, 이것은 여성 에게 유가적 정숙함()"이나 남성에게 "순종할 것()"을 이름에서조차도 강요하거나, 이보다 더 못하게 이웃나라에서 배워온 대로 여성의 이름에 의미 없는 접미사를 붙이던 그 시절 우리보다는 좀 낫지 않은가.

 

 

 

작가 구레이는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직접적인 언설"을 자제한다. 알기 쉽거나 단순 명료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 대신 인물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추적해서 어떤 사실을 유추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날개 달린 두약>은 작가가 명백하게 말하지 않지만, 조금씩 던져주는 단서들을 조합하여 답을 찾아내는 것이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다. 구레이가 과학엘리트 출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레이 본인은 이를 "숨김()"의 서사라고 하였는데, 이 절제된 서사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독자나 청중들은 의외의 시적 운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작가 구레이는 중국 이공계 대학 중 최고 명문인 베이징이공대학을 학부과정과 석사까지 모두 이수하고, 해당 분야의 취업을 앞둔 시점에 연극계로 뛰어들어 2014년 수신풍극단을 창단하고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자신이 극본을 쓰고 직접 연출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2015년 중국 연극계 최고의 문제작 <구부 상>에서 시작하여 <꿈이 사라질 때(人生不情)>(2016), <동반자관계(結關係)>(2017), <진화(進化)>(2018), 그리고 <물이 흘러내린다(水流下來)> (2020)에 이르기까지 그는 집요하게 동시대 중국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을 담아내며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이 추구하는 연극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의 연극관을 표현한 '사람의 마음은 호수입니다. 돌멩이를 던져서 예쁜 물수제비뜨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그 안에다 벽돌을 마구 던 져 넣지 않아요.", 그가 롤모델로 삼았던 (얼마 전 작고한) 리마 스투미나스가 묘사한 "외양간 천정에 맺힌 순정 물방울, 그리 고 그가 추구하는 "연극을 보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마음속에 느끼는 의미심장함", 이런 어록들은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구레 이가 추구하는 연극이 어떤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표현한 것이 다. 그리고 직접 만나본 구레이는, 사람도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