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따끄나의 아가씨'

clint 2024. 7. 12. 21:06

 

 

2010 노벨상 수상작가의 희곡작품

따끄나(Tacna)는 지명이며. 따끄나의 아가씨(Seṅorita de Tacna)는 마마에(Mamae)이기도 하고, 작중에서는 엘비라(Elvira)라 불리기도 한다. 그녀의 삼촌은 메넬라오이고 숙모가 아멜리아이다. 그들은 엘비라의 부모가 죽은 후 그녀를 키워왔다. 호아킨는 그녀가 젊었을 때 사랑했던 옛 애인으로 페루에 들어온 칠레장교였다. 까를로따 부인은 남편과 세 아이를 두고 있으나, 호아킨의 딴 정부이기도 하다. 그녀는 30살 정도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아하다. 한편 할아버지 페드로가 순간적인 욕정으로 불륜을 저지른 상대가 인디언 여인 이며 마마에에게는 그녀의 이미지가 까를로따 부인과 혼동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벨리사리오이다. 그는 작가이기도 한데, 1950년 당시를 배경으로 할 때 그의 어머니 아멜리아는 40살이며. 마마에는 100살 정도다. 한편 어머니 아멜리아에게는 오빠 두 명이 있어 아구스틴은 50살이고, 세사르는 약간 아래이다. 결국 이들 둘은 작가 벨리사리오의 외삼촌이 되며, 벨리사리오가 법을 공부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작품 초반에 호아킨, 마마에가 연애할 때 함께 과수원 산보를 했다는 카르멘은 마마에의 사촌동생이며, 벨리사리오의 외할머니로 그의 남편이자 벨리사리오의 외할아버지가 페드로이다. 한편 마마에는 사촌 동생 카르멘과 함께 살았었는데, 따라서 따끄나의 삼촌과 숙모는 결국 카르멘의 부모님이 된다. 아멜리아는 두 명인데. 먼저 카르멘의 어머니가 그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그녀의 손녀이자 벨리사리오의 어머니가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 결국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마마에는 벨리사리오의 외할머니 사촌언니가 된다. 먼 관계이지만 주관적, 객관적 묘사가 가능한 관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마마에의 손으로 키워졌으며, 그녀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이자 벨리사리오는 원래 법을 공부했으며 그것을 외삼촌들이 도와주었으나 그는 결국 이야기꾼. 즉 소설가가 되고 만다. 그는 바로 작가 바르가스 요사이기도 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3가지의 차원으로 구성된다. 즉 시간적으로 3-4 가지의 다른 배경을 이룬다. 물론 일어나는 장소는 한 곳에서 이뤄질지라도 글을 쓰는 벨리사리오가 현존하는 1980년대가 있는가 하면, 그의 할머니들이 100살 정도의 나이를 유지한 1950년대가 있다. 거기에는 따라서 할머니 카르멘과 할아버지 페드로 및 마마에가 출현하지만. 80년대에는 벨리사리오 만이 있다. 한편 50년대엔 그 노인들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벨리사리오의 어머니 아멜리아도 나오게 된다. 그리고 작품 초반에 이뤄지듯 마마에와 호아킨의 사랑 이야기는 약 18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정도에 해당되는 시기이므로 사랑 형태는 물론이고 사고의 보수성을 감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간적인 이중성으로 작품은 극중극의 형태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동일한 인물들이 행했던 모습이므로 나열식의 병렬적 극중극보다는 수직적이고 나선적인 심층구조를 취하고 있다. 동시대의 사건이 연관되어 있지 않고 다른 시대의 사건들이 거의 동일한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작품의 분석에는 따라서 갑자기 시대가 변하는 바에 주의해야 하며, 그에 따른 등장인물의 관계도 잘 감지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 대화 안에서도 벨리사리오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마마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향해 하는 말, 그리고 신부 역할을 할 때의 말이 달라야 할 것이다. 마마에의 할아버지 페드로에 대한 어투의 변화, 갑자기 벨리사리오에게 말하다가도 신부에게 말하는 순간에서의 어투 변화 역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막과 장의 구분 없이 거의 동시에 젊은 얼굴과 늙었을 때 의 얼굴이 변하게 되므로 실제 공연에서는 가면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호아킨은 군인이므로 또박또박하고 딱딱하며 틀에 박힌 어투가 요구되기도 한다. 작품은 긴박을 자아내는 장면이 없이 평이하게 마지막까지 이끌어진다.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죽음의 장면은 자살이나 살해 또는 사고사가 아닌 자연사로 그려짐에 따라 그것 또한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지는 요소는 안 될 것 같다. 제목이 보여주듯 작품의 주인공은 따끄나의 아가씨가 될 수 있어, 그녀가 젊었을 때의 삶과 나이 들어 가면서의 모습이 줄거리의 핵심같이 느껴지지만, 우린 어느새 벨리사리오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작중인물이지만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따끄나의 아가씨로 표현되는 마마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것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즉 수용자로서의 우리가 벨리사리오의 행위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면 당연 작중 그의 역할보다는 그가 작품의 외부인, 즉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한 분신으로 갖게 되는 부분에 분석의 의미를 두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상기한다면. 벨리사라오의 삶은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그것을 닮았으며, 창작과정에서 작가의 고뇌를 반영하는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가는 자신의 현 상황, 즉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가족사와 어렸을 때의 모습 및 현재에서의 자신을 볼 수 있는 허구의 거울을 작품 속에 배치시켜 반영해보고, 그것을 거의 운명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벨리사리오가 처한 상황은 다름 아닌 파탄과 좌절이다. 그가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대를 이어온 가족의 희망이다. 그의 선조들은 부유하게 살았다. 하인들이 있었으며 갖고 있는 재산도 너무나 충분했다. 적어도 벨리사리오에 오기까지 그 집안은 그랬다. 크게 성했다가 기운 집안에 있어서 그것을 다시 구원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당연하며 이미 벨리사리오의 외삼촌인 아구스틴이나 세사르에게 걸었던 기대는 무산되었으며, 벨리사리오에게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벨리사리오 또한 법에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전혀 인연이 없으니. 그것은 개인적인 좌절이자 가족의 파탄 상황이 되고 만다. 즉 변호사도 외교관도 되지 못했다는 외형적 사실은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왔으며 가족의 오랜 숙원에 부흥하지 못했으니 양쪽에 모두 파탄이라 표현될 수 있다. 절망의 상태에서 따끄나의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에게 쓴다는 행위는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아니 삶처럼 자연스럽다고 느껴진다. 직업이라기보다는 본질적 행위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따끄나의 아가씨에 대해 글로 옮겨 놓지만 그것 역시 쉽게 되지는 않는다. 쓰고자 하는 의도는 글로써 표현되면서 원하는 바를 묘사할 수 없게 된다. 여러 번 글을 써봤지만 글 쓰는 행위는 더욱 어렵게만 느껴진다. 고뇌 속에 마지막까지 이 사랑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벨리사리오는 가족들이 원했던 길에서 멀어져 좌절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 이야기꾼이 되어 있다는 발견이다. 외형과 타인의 기대에 눌려 숨겨있던 자신만의 본질적 행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면에 흐르는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이다. 어느 무도회에 나타나 따끄나의 아가씨와 춤을 추다 몰매를 맞았던 흑인의 시적 영감과 그것을 전해주었던 마마에에게서 받은 많은 분량의 이야기가 창조적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결코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흑인은 사랑에 빠졌다가 좌절한 인물이고, 마마에는 평생을 홀로 살아온 그야말로 비참한 영혼들이다. 그러나 벨리사리오는 실패한 이들의 영향으로 글을 쓰면서 좌절을 믿는 새로운 길을 찾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벨리사리오가 글을 쓰게 된 이유이며. 지금 글을 쓰면서 존재하는 원인이 된다. 이전까지의 삶은 변호사가 되려는 과정, 우리의 상황으로 쉽게 말하면 고시를 준비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가족의 외적인 희망을 가득 안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생활이었다. 벨리사리오도 그 상황에 젖어 학비와 용돈을 받아가지고 산다. 가족은 그가 법을 공부해 변호사가 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 지원한 것이지만, 그는 순간의 안위만을 위해 그런 바람을 이용한 삶이 되고 말았으니, 형편이 어려웠던 가족 상황과는 먼 선택이다. 그는 이미 돈벌이를 해야 했었다. 아니 다른 확고한 선택을 해야만 했었다. 그렇지만 과거 벨리사리오는 그렇게 스스로를 묶어놨으며 정신적인 성장 역시 가족의 희망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족의 희망일 뿐 자신은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내적인 성장에 대한 추구였다. 결국 개인적인 좌절이란 외적인 시각과는 반대로 내적인 성장의 길로 접어들면서 「따끄나의 아가씨」가 쓰여진다. 그는 이제 좌절이 아닌 구원의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 구원의 길을 닦아놓은 이가 바로 마마에이다. 그래서 마마에는 그의 픽션 속에 살아 있다. 결혼도 못하고 외롭게 살았으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그에게 제공하며 존재한다.

 

 

 

이 작품은 요사의 개인 역사를 풀어놓은 듯한 작품이다. 그는 이미 볼리비아에 살았었고. 리마와 삐우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벨리사리오를 통해 작가는 스스로를 떨어뜨려보는 기법을 사용한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벨리사리오를 통해 객관적으로 투영해본다. 작품 속의 작품이 만들어지고 각 차원의 극 사이에는 이미 벽이 없다. 시대적 차이도 거의 무시되니 시간과 공간의 딱딱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작품은 더욱 내면세계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보인다. 요사의 내면세계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자의식 적 반성과 비평 및 창작이 공존하는 형상이다. 메타극의 전형이다. 작가는 창작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창작행위에 대해 거리감을 만들어놓고, 그것의 본질과 자신에 대한 관찰을 시도하려 한다. 마지막 부분에 보이는 벨리사리오의 말처럼 창작이란 것의 내부에는 꾸며진 것과 훔친 것이 첨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부정적으로 풀이되지 않는다. 픽션의 현실모방이란 이념에 위배될 것 같지 않는 말이다.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상상되고 추가된다면 다른 모습의 사랑 이야기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끄나의 아가씨가 살아온 이야기는 다시 쓰여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삶은 이미 하나로 규정할 수 없으며, 그 변화는 이야기와 작품의 영원성을 반영 하는 중요한 예가 될 수 있다. 결국 마마에란 존재는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는다. 영원성을 얻는다. 마마에는 벨리사리오에게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고, 그녀는 다시 벨리사리오를 통해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창작의 근본목적인 불멸성과 닿는 순간이다. 작품은 열려지고, 그 열린 문으로 관객이 동일한 자의식의 거울에 온몸을 비춰본다. 작품 속에서 이뤄지는 작가의 이런 고찰이 수용자의 눈에 들어 왔을 때는 현실 속의 수용자에 간접적인 파급효과를 미치게 된다. 문제의 핵심과 해결방법은 타인에 있는 게 아니라. 결국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자기에의 성찰은 이렇게 허구와 현실을 오가면서 성숙된다. 요사의 자의식 적 자기반성은 이렇게 현실 속의 우리에게 파급되면서 그의 문제는 우리 공동의 문제로 화하게 된다. 작가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뇌 찬 반영은 결국 장소나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어 이 작품을 대하는 특정화되지 않은 수용자 관객에게 '나에 대한 깊은 반성과 이면 통찰을 가능케 하는 거울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 행위는 진행형으로 남는다.

 

 

Mario Vargas Llosa

 

작가소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는 1936년 페루의 아레끼빠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볼리비아의 꼬차밤바에서 공부했으며, 중등학교는 페루의 리마와 피우라에서 마쳤다. 리마의 산 마르코스(San Marcos)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마드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몇 년 동안 파리에 머문 적이 있으며, 이후에는 런던과 바르셀로나에서 생활했다. 1952년 그의 첫 극작품을 피우라에서 무대에 올렸고, 레오폴도 알라스 상을 받은 단편 「두목들」이란 작품을 1959년 출판하였으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도시와 개들」 이란 소설의 출판을 통해 이뤄졌다. 이 작품은 1962년 비불리오떼가 브레베 상을 받았고, 1963년에는 끄리띠까(Critica)상을 받은 바 있으며 순식간에 20여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1966년 그의 두 번째 소설 「녹색의 집」(La casa verde)이 나와, 1966년 끄리띠까 상을 받았고 1967년에는 로물로 가예고스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강아지들」(1967)이란 단편이 나왔고, 장편소설 「성당에서의 대화」(1969). 연구서인「가르시아 마르케스: 신 죽임의 역사」(1971)가 나왔다. 소설로는 1973년「판탈레온과 위안부들」이 있었고, 에세이로는 1975년 「영원한 술잔치: 폴로베르와 마담 보봐리」가 있다. 1977년에는 소설 「훌리아 아줌마와 필경사」가, 극작품으로는 1981년 「따끄나의 아가씨」가 출판된다. 이 밖에도 「까띠에와 하마」(1983), 「라 충가」(La Chunga, 1986),「세계 종말의 전쟁」(1981).「마이따의 이야기」(1984).「누가 빨로미노 물레로를 죽였나?(1986), 「화자」(1987) 등이 있다. 그는 페루 출신이지만 스페인의 한림원 정회원으로 임명되었고, 스페인어 권의 노벨상으로 평가받는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받는 등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손꼽히는 국제적 거목 중의 하나다. 특히 노벨상 후보로 매년 지명되다가 2010년 드디어 노벨상을 수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