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존 웹스터 '하얀 악마'

clint 2024. 7. 8. 17:38

 

 

내연 관계이던 비토리아와 브라치아노 공작은

각자의 배우자를 살해한 뒤 파두아로 도피해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추기경과 유력 귀족 가문이 살해된 친족의 복수를 위해 두 사람을 쫓는다.

결국 브라치아노 공작과 비토리아 모두 죽게 되었고,

브라치아노의 비서이자 비토리아의 친동생이었던

플라미니오 역시 둘의 불륜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1612년 초에 레드불 극장에서 공연된 존 웹스터의 <하얀 악마(The White Devil)>는 공연되기 30년 전쯤에 이탈리아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의 진보는 작품의 전체구성과 큰 차이가 없다. 브라치아노 공작은 연인 비토리아와 공모해 자신의 아내와 당시 유력했던 추기경의 조카인 비토리아의 남편을 살해했다. 이 살인사건으로 인해 비토리아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탈출, 파누아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브라치아노와 결혼했다. 그러나 추기경과 그의 유력한 친척들이 살해된 친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브라치아노와 비토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비토리아의 동생이자 브라치아노의 비서였던 플라미니오 역시 이들의 부적절한 관계에 관여한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웹스터는 이 사건의 정황이 담긴 여러 기록을 참고했는데, 적어도 3가지 기록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서 웹스터는 불륜과 음모, 복수를 위한 폭력과 같이 비극에 어울릴 만한 요소들에 주목했으며, 이를 통하여 부패한 정치권력의 영향으로 당시 런던에 만연했던 탐욕과 야망, 질투와 복수심 같은 일련의 나락상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웹스터 본인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비록 <하얀 악마>가 초연되던 날 날씨와 극상의 위치, 그리고 교양 없는 관객들의 몰이해로 인해 공연 자체가 성공적이지는 못했으나, 오늘날 이 작품은 근세 초기 대중극장에서 공연되었던 훌륭한 복수 비극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웹스터의 다른 작품인 <말피 공작부인(The Duchess of Malfi)>(1613~1614)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여성이 이야기 전개의 중심에서 사실상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작품의 제목인 '하얀 악마"라는 표현 자체가 주인공 비토리아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 비토리아라는 인물은 악마적인 속성을 지닌 동시에 그 속성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리아의 악마적 속성은 작품 초반에 명백히 드러난다. 교회에 딸린 묘지에 서있는 주목과 관련한 자신의 꿈을 브라치아노에게 이야기하는 이 장면에서, 비토리아는 교묘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브라치아노에게 전한다. 브라치아노의 아내인 이사벨라와 비토리아의 남편인 카밀로가 주목을 공격하다 오히려 반격을 당해서 죽는 이 꿈은 실제사건의 경우처럼 브라치아노에게 이들의 살해를 주문한 것과 다름없다. 주목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yew' 'you'의 발음(jul)이 같다는 점에서 볼 때, 주목은 분명 브라치아노를 의미한다. 한편, 브라치아노가 이 꿈을 이해하는 방식은 좀 더 신중하다. 그가 이해한 꿈의 내용은 질투심 많은 비토리아의 남편과 냉담한 자신의 아내가 보일 시기심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호"라는 말의 의미에 해석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브라치아노는 망설임 없이 카밀로와 이사벨라를 제거했고, 비토리아 역시 그가 꿈의 내용을 잘못 이해했다고 나무라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웹스터가 이룩한 가장 주목할 만한 성취는 '비토리아'라는 인물일 것이다. 모순된 삶을 통해 전형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는 극적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흠이 많고 이기적이며, 타인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매우 강인하고 침착하다. 전통적 여인상을 대표하는 이사벨라와 대척점에 있는 비토리아는 기존 질서를 어지럽혀 사회구성원들, 특히 남성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남성들이 행하는 일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그런 행위들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비토리아는 남성들의 행동 방식을 최대한 활용해 정치권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면에서 볼 때, 다시 한번 "하얀 악마"라는 제목은 그녀가 지닌 능력, 즉 정치적이고 언변에 능하면서도 담대한 농시에 악마적이고 자기 이 익만을 추구하는 행동 방식을 보이는 기존의 여성상을 초월하는 인물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따라서 비토리아는 영국 르네상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장 주목할 만하면서도 인습에 구속받지 않는 여성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비토리아의 모습은 카밀로 살인사건으로 열린 그녀의 재판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각국의 대사들과 성직자들로 구성된 이 재판정 장면은 남성들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 홀로 선 비도리아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녀는 주눅이 들기보다는 오히려 이 남성들을 놀리는 담대함을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항변을 통해 우리는 이 재판정의 모순점들을 여과 없이 목격할 수 있다. 비록 남성들이 모든 재판 과정을 주도하고 있기에 유죄판결을 받긴 하지만, 재판정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적대적인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흔들림 없이 담대하며, 심지가 굳고, 언변이 뛰어나서 자기 뜻을 분명히 밝힐 줄 아는 이성으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세우고 있다. 국가의 사법 제도와 사회 구조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잘 보여 주는 이 장면은 영국 르네상스 드라마에 나타난 중 요한 여성 해방 운동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웹스터는 이 작품에서 인습타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 작 품의 내용, 특히 관습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플라미니오의 냉소적이며 두들린 관찰을 통해서. 엡스터는 조직적인 부조리가 이루어지는 사회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적한다. 따라서 웹스터는 성차별 문제 외에도 인종 차별과 계급 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결국, 비토리아가 법정에서 받은 심문과 이에 대한 항변은 웹스터의 사회에 대한 비평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단순히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일 수 있는 이 장면은 죄를 지었으나 오히려 희생양이 된 한 여성에 대한 단죄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에 이를 때쯤, 우리는 권력을 잃고 귀족사회 남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복수극의 희생양이 된 비토리아를 목격하게 된다.

 

 

 

비토리아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플라미니오다. <말피 공작부인>에 등장하는 보솔라(Bosola)와도 비교되는 이 인물은 <하얀 악마>에서 단연코 최고의 사상가이며, 비토리아와 더불어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인물이다. 플라미니오의 대사는 대부분 운문체가 아닌 산문제로 되어 있으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에서 그는 가장 신랄한 비유를 사용하는 최고의 시인이다. 보솔라처럼 그도 제한된 사회적 신분 때문에 권력자들의 비서나 조수로 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수용하고 있지만, 신분상승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계략에 충격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계략에 매혹된다. 권력자들은 비윤리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지만, 그들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힘 있는 자들의 부패한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플라미니오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그러한 범죄행위가 부귀영화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결점들을 냉소적으로 인지하면서, 그러한 사회의 제도를 시험한다. 작품 내내 플라미니오는 권력자의 명령에 따라 다양한 비윤리적인 범죄행위들을 수행하고 심지어 자신의 동생인 마르첼로를 살해하며, 마지막에는 누나인 비토리아의 목숨까지도 위협한다. 그러나 작가는 계속해서 그에게 가장 철학적인 대사들을 부여한다. 이제껏 목격한 삶에 대한 그의 논평은 대부분 금욕적이고 극기심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암초에 부딪혀 생겨난 보기 좋은 파도의 거품 때문에 사람들이 그 암초가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듯이 부귀영화를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취한 사람들은 곧 닥칠 불행을 외면한다. 행운의 여신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죽음으로써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분주하기만 한 삶이란, 죽음의 영원한 안식을 받아들일 때 간절히 원하는 헛되고 헛된 것이니, 죽음이라는 순간의 고통을 통해 모든 고통을 끝낼 망각의 상태를 찾아야 한다.... 이렇듯, 삶에 대한 플라미니오의 관조가 담긴 대사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지만 그러한 대사에 담긴 역설은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유난히도 추악한 사실들을 초월하는 일종의 보편적 진리를 찾고 있다.

 

존 웹스터(1580년? - 16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