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셰익스피어 재창작 배요섭 '노래하듯이, 햄릿'

clint 2024. 7. 7. 08:17

 

 


어릿광대 무당 보비리는 어느 날 황량한 계곡을 지나가다 
해골을 하나 발견한다. 계곡의 바람이 해골을 스쳐 지나가면서 
슬픈 곡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옆에 살아생전 그가 

지니고 다녔을 법한 빛바랜 수첩을 발견한 보비리는 그 죽은 해골이 

지난날 비극적으로 죽어간 햄릿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햄릿은 그때까지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밤마다 계곡을 헤매고 있었던 것.
보비리는 그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진혼굿판을 벌이기로 한다.  
보비리와 함께 다니는 또 다른 세 명의 어릿광대 무당들이 모여 든다.
착하고 순진한 무룡태, 깐작깐작 삐딱한 앙짜, 엉큼한 은근짜, 
이들은 햄릿이 남긴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그의 삶을 되짚어준다. 
햄릿이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무슨 고민들로 자기 삶을 괴롭혔는지, 
또 어떤 후회를 남겼는지 살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들쳐 보여 준다.
이로서 햄릿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곧 이은 어머니의 결혼, 그것도 아버지의 동생인 
자기 숙부와 결혼하는 어머니를 지켜봐야했던 햄릿의 고민들을 

어릿광대들은 햄릿을 대신해 내뱉어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 아니라 숙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숙부가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왕좌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햄릿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답답해진 어릿광대들은 햄릿을 다그치고, 얼러주고, 때론 욕을 해댄다. 

겁쟁이, 비겁한 놈, 멍청이라고. 
햄릿은 다시 힘을 내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히 수행한다.
연극 공연을 통해 왕의 심중을 떠보고 확실한 물증을 잡아 단번에 처치해 
버리려는 작전. 하지만 또다시 햄릿은 결정적인 순간에 기회를 놓치고 결국 
쫓겨 가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사랑했던 오필리어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오필리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햄릿은 결국 돌아와 복수를 하게 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이승의 언저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익살광대들은 햄릿의 최후를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어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어떤 것은 비장하게, 어떤 것은 잔인하게, 또 어떤 것은 애처롭게 끝이 난다.
이러나저러나 죽음은 허망한 것. 그것만큼이나 삶도 허망하다는 것을 햄릿도, 
이 굿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마지막 진혼곡소리가 굿판을 울릴 때 햄릿의 영혼은 덤덤히 이승을 떠나간다.

 



네 명의 익살광대들이 펼치는 희극적 비극
네 명의 무덤지기 익살광대들이 수레를 끌고 등장한다.
이들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영혼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안내자들로, 죽은 이들의 물건이나 그의 형상을 본뜬 가면과 인형들을 
정성스레 모셔 놓고 저승길로 인도해 주는 노래를 불러준다.
이들의 수레 속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이 담겨져 있고, 그 사연들로 
수다 떨며 노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낙이다.
이들에게 죽음이란 삶을 끝내고 심판받으러 가는 관문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욕망과 미련을 멈추게 하고 또 다른 삶으로 돌아가게 되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또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죽이고 싸우고, 복수 못해 안달하고, 사랑 잃은 

슬픔에 가슴 저미는 삶들 모두가 그들에게는 우습고 허망하게 보일 뿐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웃고 떠들 수밖에.

 

 


인형과 가면, 음악이 어우러지는 난장판 <노래하듯이, 햄릿>은 
죽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가지고 노는 한바탕 난장이다.
네 명의 광대들이 햄릿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모두 연기하는데, 
장례를 치루고 남겨둔 물건들은 이들이 변신하는 도구가 된다.
광대들은 또한 기이하고 그로테스크한 노래로 각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 노래들이 때로는 매우 애절하고 절실하게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퍼쿠션의 앙상블은 
배우들의 코믹한 창법과 어우러져 묘한 불협화음이 된다. 그래서 마치 
극 전체의 음악은 장례식의 곡소리와 구석에서 벌어지는 왁자지껄한 화투판의
웃음소리가 버무려진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낸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인 <햄릿>. 
무수한 햄릿들이 무대에 올랐다.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노래하듯이, 햄릿>은 원작 햄릿이야기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토대로 
만들어졌지만, 대본과 연출을 맡은 배요섭의 새로운 접근과 노련한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어우러져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햄릿이야기 '노래하듯이 햄릿'이다.

 


재창작의 글 - 배요섭
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내게 이 작품은 그렇게 비극적이지도 않고, 진지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가장 진실되게 다가오는 건 자살한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면서 농담을 나누는 무덤지기들 얘기들이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그렇게 무덤덤하고 태연할 수 있는 건 단지 남의 일이기 때문만일까. 그들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떠나갈 것 같아 보인다. 죽음과 너무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들에겐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햄릿을, 햄릿의 삶을, 햄릿의 머리 속을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그러면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릿광대, 혹은 익살광대들처럼 웃기는 짓거리 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죽은 이들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주고 떠나보내는 무당 같은 존재면 어떨까 생각했다. 무당들이 薦度굿을 하듯 이들은 죽은 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굿을 한다. 그래서 이 연극도 일종의 굿이 된다. 사물들이 변신하는 인형극에 음악이 좀 더 가미되면서 ‘굿’으로서의 형식은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음악(노래)은 이야기를 서술해주기도 하고 인물의 심정을 더 깊이 드러내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들처럼 햄릿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생각이나 태도를 관객들에게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이 극중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 그것은 관객이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이성을 오가며 이 사건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때도 객관적인 거리를 가지고 대하는, 그런 발견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음악은 좀 더 원시적인 스타일의 악기와 선율을 생각했으나, 작곡자와 작업을 해가면서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다.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등장인물들의 연기와 세련된 스타일의 선율의 충돌을 통해 처음에 의도했던 낯설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재미 더 잘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건방지고 버릇없어 보이는 익살광대들이 거친 입으로, 곱고 정직하게 작곡된 노래를 침 뱉어 내듯이 불러대는 재미가 오히려 극의 특성을 더 잘 살려준다고 생각한다. 첼로와 피아노의 세련된 질감과 거칠고 못생긴 목소리의 불협화음이 불쾌하기는커녕 통쾌하게 관객을 관통할 거라 기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이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 때문에 불편해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죽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익살광대들이 마지막에 얼토당토않은 세 가지 버전의 복수극을 보여주듯이 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 죽음이 아련하고 슬프게 느껴지는 건, 이별 때문이 아니라, 한 맺힌 삶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허무함 때문이다 라는 익살광대들의 어이없는 메시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