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지일 '이춘풍 난봉기'

clint 2024. 6. 7. 15:01

 

 

조선 숙종때 한양에 이춘풍이라는 양반이 살았는데 부모가

남겨준 수많은 재산을 방탕한 생활로 모두 탕진해 버린다.

잠시 잘못을 뉘우치고 아내에게 집안일을 다 맡긴다는

각서 쓰지만 아내가 삯바느질로 재산을 모으자

다시 본성이 발동하여  나랏돈 2만 냥을 빌려

장사하겠다며 평양으로 가버린다.

평양에 도착한 춘풍은 기생 추월에게 빠져

가진 돈을 몽땅 날리고 오갈 데 없자

추월의 집 하인이 되어 구박받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춘풍의 아내는 뒷집에 사는 참판이

평양감사로 가게 되자  비장으로 써 달라고 청하여

남장을 하고 따라간다. 그리고 평양에 도착하자

춘풍과 추월을 잡아들여 매를 치고

추월에게 춘풍의 돈을 물어내게 한다.

집으로 돌아온 이춘풍은 먼저 와있는 아내 앞에서

돈을 많이 벌어 온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만

곧 아내가 바로 자신을 구해 준 비장임을 알게 되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쳐 새 사람이 된다.

 

 

 

 

 

<이춘풍전>은 흔히 우리 고전이 갖는 관념적 인과론보다는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만들어낸 현실적 합리주의가 우세한 풍자해학 소설로 꼽힌다. 풍자는 해학보다 조금 모가난 성격을 지닌 가시가 있으나 모두가 "웃음"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성이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냉소적이면서 조롱조로 비난, 공격하면서도 그 뒷면에는 시정을 촉구하는 개선의지(改善意志)가 뚜렷한 힘으로 버티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서민예술의 성격으로 들 수 있는 이 풍자와 해학의 힘은 곧바로 마당놀이의 기본 정신 가운데 하나이다. 마당은 그 자체가 평면적인 것이듯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평등의 장소다. 법과 권력 앞에서 평등하고, 남자와 여자가 평등 하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평등할 수 있어야 한다.
천하의 풍류한량 이춘풍이라지만 생산성이 없는 풍류는 곧 퇴폐의 원조이자 방탕이다. 풍류라는 미명으로 호도되어 온 이조양반, 선비계층의 놀아남이 오늘날의 향락 풍조와는 전혀 별개의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춘풍전〉에서의 새로운 인간상은 춘풍의 처다. 굴종과 압박으로 점철되어 온 이조여인사에서 단연 뛰어난 행동가요, 여성해방의 선각자다. 그러나 춘풍의 처도 공정해야할 법과 권력을 이용하여 볼기부터 치는 재판을 하니 여권신장의 공을 인정하고 웃음과 신명 속에서 평가하길 바란다.

 

 

 

작가의 글 : 다시, 이춘풍을 대면하며 (김지일)
이번 마당놀이 <이춘풍>은 1984년의 초연, 1992년의 재공연에 이은 세 번째 작업이다. 같은 작품인데도 매번 작품과 인물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1984년 초연의 프로그램 작가의 말에서 '끝까지 미워할 수 없었던 인물'은 추월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만이 악역에 대한 응징자였기 때문이다. 추월이 춘풍의 재물을 수탈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집의 하인으로 삼는 것을 철저한 응징으로 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그러나 남편을 구출하고 끝없이 용서하는 춘풍 처의 행동은 결국 춘풍 행각의 온상 구실 밖에 더 할게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을까' 라고 피력했다. 그리고 1992년 재공연의 프로그램 작가의 말에서는 '처음 고전소설 이춘풍 전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줄거리의 탄탄함과 사실성이 여타의 우리 고소설과 구별되었고 전개의 곳곳에 마련된 반전과 복선이 돋보였다. 또한 풍부한 사회의식은 감탄스러운것이었다. 그러나 8년만에 다시 마당놀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간단없는 회의에 빠지곤 하였다. 춘풍의 처 김씨가 재래적인 현모양처의 틀에서 벗어나 남편을 적극적인 의지로 구하지만 그 방법이 권력을 등에 업는, 당시로서도 바른 방법적인 것이었냐 하는 점을 해결하지 못한 나의 무능력은 김씨의 노래 몇 개를 의식화(?)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어쩌면 샤일록과 대칭되는 인물인 기생 추월은 사회와 제도의 희생자일 뿐이다. 추월에게 항변의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이 해결 일 수는 없었다. 나를 끝까지 괴롭힌 것은 내가 결코 이춘풍을 미워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춘풍보다 도덕적인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물음에 나는 끝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만의 대답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 전체가 대 답할 명제라는 합리화를 해 보았지만 역시 부끄러움이었다.'고 적었다. 다시 10년도 넘어서 <이춘풍> 앞에서 곤혹감을 떨칠 수가 없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지탄 받아 마땅한 이춘풍을 호방하다는 이유로 사랑하고, 불법으로 불의한 자를 구하는 김씨를 찬양하 고 오로지 복수심과 질시로 추월의 행위를 통쾌해 하고있는 혼돈의 양상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작업은 그런 사회적 병폐를 고스란히 뒤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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