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예브게니 시바르츠 '드래곤'

clint 2024. 3. 18. 21:31

 

 

고전 동화를 차용하거나 동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작품을 써온 시바르츠는 알레고리적 상징, 모호한 선악개념, 허를 찌르는 반전을 통해 당대 사회와 정치적 현실, 인간의 본질과 품성을 꼬집고 폭로했다. <벌거벗은 임금님>(1934), <그림자>(1940)에 이어 전제 폭군 3부작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하는 <드래곤>(1944)은 시리즈를 마감하는 희곡답게 대답하고 용감무쌍하다. 이 세 작품은 권력의 본질과 대중의 속성, 통치의 기술, 정치의 타락과 왜곡 등을 예리한 알레고리로 재구성한 희곡들이다. 삼부작이 집필된 시기는 유럽에서 정치권력의 기형화와 대중의 우민화가 극심해지던 때였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고 제국주의 침탈과 폭압이 세계적 규모에서 자행되던 절망의 시대였고, 2차 세계대전은 그 모든 폐단과 모순을 유혈낭자한 살생의 지옥도로 도상화 한 사태였다. 문제는 소련 또한 유럽의 파시즘 못지않게 독재자의 전횡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 스탈린의 폭압과 학정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당연히 시바르츠의 전제 폭군 삼부작은 검열의 마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림자>도 상연 직후 레퍼토리에서 내려와야 했으며, <드래곤> 또한 비슷한 처지였다. <드래곤>의 위험성을 간과한 권력 당국은 레닌그라드 코미디극장에서만 상연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공연을 허락했지만 단 1회 만에 바로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62년 같은 극장에서 재공연 되었을 때도 몇 회 공연하지 못하고 금지 명령이 날아들었다. 노골적인 정치풍자 드라마도 이렇게 혹독한 탄압을 당한 사례가 없었다. 용이 나오고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등장하는 동화 같은 작품에 대해 그렇게 예민한 대응을 한 것은 그만큼 <드래곤>의 메시지가 권력과 통치의 본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뜻 보기엔 유치하고 단순하지만, 언중유골 정신과 골계미를 장착한 동화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이 동화의 주인공 랑셀로는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다. 랑셀로의 모험담은 중세 때부터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서 왕의 왕위 계승을 돕다가 크게 패해 아들을 호수에 버리고 떠났는데, '호수의 여신 비비안이 그를 거두어 키운다. 이후 랑셀로는 비비안이 준 마법의 반지와 명검을 받아 카멜롯에 입성해 원탁의 기사가 된다. 이후 랑셀로는 수많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는데, 아서 왕 전설의 자국 버전을 만들고자 한 프랑스 민중의 염원이 녹아 난 전설 속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드래곤> 20세기에 출현한 랑셀로 전설로서, 무시무시한 드래곤으로 기형화 된 전제 권력을 비판하는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랑셀로 뒤 라크(Lancelot du Lac) '뒤 라크' '호수'라는 뜻이다. 이름을 풀면 '호수의 기사 랑셀로가 된다.)

랑셀로 서사는 드래곤을 물리치는 동화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는 사랑하는 엘사를 비롯해 도시 거주민들을 사악하고 잔인한 드래곤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흥미로운 점은 드래곤이 일반적인, 혹은 일방적인 악이 아니라 인간으로 변신해서 인간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드래곤은 콜레라 퇴치에 도움을 주고 집시들을 추방하거나 시정을 안정화하는 등 마을에 유익한 행동도 한다. 게다가 시민들의 약점을 분석할 줄 알고 그들의 심리를 이용할 정도로 영리한 통치술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은 자신의 지배가 폭압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게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 자체가 그런 지배를 수용, 용인할 정도로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 악의 공생론을 통해 자신의 전제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나약하고 이기적이기 그지없다. 그런 연약한 영혼은 억압과 착취에 취약하다. 악에 쉽게 길들여지고 선을 쉽게 망각한다. 드래곤은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게 가치 있는지 묻는다. 착취와 만행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단순히 인내하고 버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래곤을 옹호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폭압적 지배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드래곤의 필요성까지 역설한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사람들 내면에 학습된 패배주의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드래곤이 없어지더라도 치유되거나 극복되지 않는다.

길들여진 패배주의와 내면화된 무력감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이것을 극적으로 폭로하는 장치가 바로 대통령으로 등극한 시장과 그의 아들 앙리다. 이들은 인간의 온갖 속물성을 긁어 모으듯 수합한 파렴치한들이다. 그들의 집권 의도는 어떠한 신념이나 이상의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급하고 추악한 재물욕과 전제 욕망에 있다. "드래곤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간단히 말해, 바로 이 손과 앙리 손에 들어왔다는 겁니다"라는 대사가 바로 이들의 파렴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엘사와 결혼하려는 사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권력 남용. 상대방의 의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일방성, 부자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하를 매수해 염탐하는 추악한 패륜, 사람들을 마구 감금하는 무소불위의 행태 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락한 권력자들이 보여준 흔한 모습이다이 구제불능 부자(父子)만큼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드래곤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비굴함과 비겁함을 버리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태다. 엘사는 그들의 위선과 비루함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이처럼 <드래곤>은 모든 동화가 해피엔드로 끝나는 지점에 흥미로운 반전을 배치해 피착취자들의 정신적 독립성과 자활 의지, 해방 가능성을 타진하는 심오한 철학작품으로 변모한다. 심지어 피날레의 랑셀로가 새로운 통치자로 등극하는 장면에서도 과연 그것이 진정한 해피엔드가 될 수 있을지 묘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랑셀로가 제3의 드래곤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에 대한 간접 질문이 그것이다.

랑셀로는 전쟁을 반대하느냐는 드래곤의 질문에 "평생을 싸워 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피날레에서 그가 제시한 대안 목록에도 전쟁이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엘사. 보시다시피 난 예전의 내가 아니오"라면서 단호한 인물로 변모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전쟁옹호론과 과단성은 자칫 과도한 정산주의와 무력의 정당성에 경도될 위험도 다분하다. 정원사는 이 점을 눈치챈다. 그는 인내심을 강조하고 조심성과 신중함을 부탁한다. 이에 대응해 랑셀로가 제안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단순하다. 바로 사랑이다혹자는 그 사랑이 구체성이 없고 막연하다고 비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화에서 그런 구체성을 바라는 건 무리다. 랑셀로는 사랑의 실천방법에 대해선 함구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지는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대요'로 끝나는 동화와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다사랑하기라는 대안은 사소할지 모르나 그것 하나도 드래곤 한 마리씩 죽이는 것만큼이나 정말 힘든 일이다. 전쟁보다 평화가 더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나 평화를 바라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류 최악의 살육전이었던 2차 세계대전과 전쟁 못지않은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시바르츠로서는 그 이상의 대안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브게니 시바르츠 (Евгений Львович Шварц, 1896∼1958)
생전에 희곡을 20편 이상 집필했으며, 영화 시나리오 11편을 완성한 러시아 극작가다.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1917년 혁명이 발생하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훌륭한 발성법과 유연한 연기술로 평단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배우로서 보장된 미래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0년대 초에 당시 최고의 동화 작가였던 코르네이 추콥스키의 비서로 들어갔다. 그 뒤 1923∼1924년 사이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 데트 사라이란 필명으로 시적인 칼럼을 썼다. 1924년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시바르츠는 국립 출판사의 아동 도서 분과에 들어갔다. 시바르츠가 맡은 일은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작가들의 구상과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확장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희곡과 시나리오는 영화,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로 제작되었고, 여전히 러시아 전역에서 인기리에 상연되고 있다.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연출가 아키모프는 1956년 작가의 회갑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바르츠의 동화가 성공한 비결은 이겁니다. 그는 마법사와 공주, 말하는 고양이, 곰으로 변한 청년 등을 통해 정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해 주고 있고, 행복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선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