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데론의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성찬신비극의 대표작이고,
〈살라메아 시장)은 〈인생은 꿈이다〉와 더불어 '코메디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성찬신비극은 17세기 스페인에서 발전한 독특한 종교극인데, 특히 칼데론은 성찬신비극의 대가로서 그에 의해 성찬신비극이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먼저 성찬신비극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가톨릭교회의 성찬(혹은 성체) 교리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토대를 점검해야 하는데, 그 근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 때. 빵을 들어 사례한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 한 말씀에 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 또 식사 후 잔을 들어 사례한 다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린 피니라”, "너희는 이 예를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제자들에게 명한 말씀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빵과 포도주의 성체화'이다. 즉 성찬식은 구세주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상기하고 그 신비에 참여하는 것으로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예수의 몸과 피에 의해 예수의 속죄의 역사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보았을 때, 성찬신비극은 하느님의 신비를 알려줘서 그것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속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서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주제와 대중적 취향의 서정성, 극적 감동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종교극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성으로는 절대로 감지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신성한 신학의 문제를 연극으로 만들어놓은 설교"라는 것이다. 성찬신비극의 중요 주인공들로는 신, 인간, 악마가 있으며, 각각 그들의 협력자 혹은 반대자들이 보조 인물로 나타난다네. 하지만 극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스럽고도 진정한 실재인 성찬(혹은 성체)의 신비가 있는데, 거기서는 알레고리적인 상징은 사라지고 믿음을 통한 본질적인 실재만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성찬신비극은 원래 성체절 축제의 한 부분을 이류는 공연 장르로서 축제적인 특성이 대표적이기 때문에, 종교성과 생동감. 축제성이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 전역에서 상당히 화려하게 치러지던 종교 행렬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종교 행렬에 무대 장치가 된 대형 수레를 같이 가지고 다니다가 그곳에서 연극을 하곤 했다. 처음에 성찬신비극은 교회 내에서 상연되었다가 17세기부터 공공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무대만 설치되다가 점차로 각종 장식품과 화려한 의상실까지 딸린 대형 무대, 가끔씩은 23미터에 이르는 초대형의 긴 무대가 설치되었다. 무대장치는 대단히 복잡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이는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장치였다. 그러니까 성찬신비극으로 인해 연극의 무대장치 기술이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상연은 아주 세세한 법규의 제약을 받았다. 관객들은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성찬 신비극을 보러 왔고, 그래서 작가와 배우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 정신적, 도덕적, 문학적, 미학적인 의미를 밝혀내고 결국에는 그것에 설복된다. 특히 성찬신비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창조주 (혹은 작가)의 입을 통해 세상에서의 배역을 갖게 되는 등장인물의 알레고리적 속성과 극적인 상황이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중구조에 의해 고도의 상징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이라는 거대한 연극〉에 대해 먼저 세상이 하나의 연극 무대라는 것은 칼데론이 살던 시기에 이미 '인생은 꿈'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또 '세상은 거대한 연극' 이며 인간 개개인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다가 죽음과 함께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 자신이 한 연기에 대한 평기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인식은 아주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 작가는 그저 그것을 소재 삼아 연극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무대 장치가 흥미롭다. 무대 양 옆에 배우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두 개의 문이 있는 데 요람과 무덤으로 형상화한 것이 매우 기발하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 무대가 지구를 상징하는 하나의 구(球) 속에 있는 것으로 상징하고, 또 다른 구를 만들어 창조주가 있는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도록 두 개의 구체를 이용하게 했다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대체로 17세기 연극을 보면 텍스트에 무대 장치에 대해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이 보편적인데, 어째서 칼데론은 무대 장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전 시대 연극의 무대는 기술적으로 무대 장치 랄 수 있는 것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무대 장치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무대 장치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밖에. 그러던 것이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히 무대 장치 기술도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왕실이나 귀족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많이 썼으며 또 그들의 지원을 받고 작품을 상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조건과 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극을 올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성찬신비극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다 보여주기 위해서 작품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무대장치를 작품에 직접 설명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신(창조주)이 인간을 지상에 내려 보내기 전에 그들의 직업상의 지위를 정해주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에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민족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창조주의 뜻은 부인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반대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런 측면은 어찌 보면 예정론적인 측면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나는데, 작가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 예수회파 사제로서 결코 자유 의지론을 저버린 적이 없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이 앞으로 태어날 운명을 정해주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 중요한 것은 주어진 역할 그 자체가 아니라 맡은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삶은 어떤 경우에건 간에 일시적인 것이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영원한 삶이 뒤따를 것이라는 결론으로 극이 끝난다. 즉 신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만 정해주었을 뿐이지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하라는 행동지침까지는 맡겨놓지 않으셨다. 대본으로 신의 말씀을 주셨고 그저 맡은 역할을 잘 하라는 것밖에는. 그러므로 맡은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해내느냐는 결국 인간 스스로의 문제란 말이다. 결국 거지는 선한 거지가 되고 왕은 선한 왕이, 부자는 선한 부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보상이 있다면 그것은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인 후일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창조주의 말씀에 따라 훌륭히 수행해내고, 그런 다음에 창조주의 왕국에 가서 상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왕, 부자, 미인, 농부, 거지 등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처음에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들의 역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일반인으로 돌아간다.
세상이라는 연극이 끝나고 왕, 부자, 미인, 거지, 농부 등이 무대를 떠날 때
그들은 무대에서 입었던 옷을 반납한다.
마지막 순간 창조주로부터 자신이 맡은 역을 연기한 것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무대이며
인간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다가 죽음과 함께 그 역을 마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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