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강백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

clint 2023. 11. 21. 06:04

 

 

 

작가의 글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는 1975년 연극평론 겨울호에 발표한 희곡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현대사(現代史)를 단 한편의 희곡에 담아 보겠다는 거창한 욕심을 갖고 썼었다. 진열된 예술품들이 모조리 도둑맞아 없어져버린 미술관, 그것은 일제(曰帝)의 식민지 통치 시대를 겪고 난 우리의 참담한 모습이었으며, 과거의 영광에 집착한 망상(妄想)적인 주인과, 예술품이 없어진 그 자리에 그림과 조각 노릇을 하고 있는 무기력한 등장인물들, 그리고 '바악'이란 등장인물에 의해서 진행되는 새로운 변환, 그것은 내 눈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이 작품을 쓸 때 난 악몽을 꾸곤 하였다. 그 악몽이란 거대한 공룡과의 싸움이었는데, 내가 칼로써 공룡의 목을 치면 다시 그 잘린 자리에 새로운 목이 나타나는 그런 꿈이었다. 자르고 잘라도 계속 나타나는 그 공룡의 목은, 이 희곡을 쓰는데 있어서 힘이 벅찼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장을 쓰고 난 날 밤의 꿈은, 공통이 죽어서 내가 그 공통의 시체 위에 흙을 덮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흙을 다 덮고 난 뒤 바라보니, 그 공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꿈틀꿈틀 하는 것이었다. 즉, 그 꿈은 공통을 죽이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을 끝냈음을 의미하고, 아울러 우리의 현대사에 품고 있는 두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는 1976년 방태수씨의 연출로 극단 에저또에 의해서,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초연되었고, 곧이어 장소를 쌔실극장으로 옮겨 연장 공연되었다. 방태수 씨의 연출 특징을 잘 살린 무대를 만들었지만 흥행에는 대참패였다. 1976년에는 단 한 편의 희곡도 쓰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의 흥행이 대참패로 끝났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 극단 자체가 빚을 잔뜩 진 형편에서 작품 료를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거창한 욕심을 내었던 희곡이 아무런 반응을 받지 못한 허탈감이 겹쳐서 의기소침해졌다.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는 1975년에 발표된 장막극으로 작가 자신이 노트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단 한편의 희곡에 담아보겠다는 거창한 욕심을 갖고 쓴 것`이다.

 

 

 

 

 


작가는 1막 앞부분에서 장소는 미술관이며 그곳에 진열된 미술품 등은 모조리 도난당했지만 여전히 미술관으로 외부에 알려진 상태라는 것과 건물 내부의 커다란 백색의 벽에는 사람들이 하루 세끼 식사시간만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벽에 붙어있다는 기이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 있다.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가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알레고리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한 힌트가 많이 주어지지 않아 [결혼]이나 [물고기 남자] 만큼 작품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데는 이 작품이 발표된 시대적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제 4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이 통치하던 시대이며 또한 유신헌법이 시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이 사전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정치적 분위기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표면적인 줄거리만 가지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 만큼 사실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억압된 상태에서 오랫동안 길들여진 후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늙은 주인과 바악은 각각 어떤 식으로 미술관에서의 혼돈을 정리하고자 했는가?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며 작가가 궁극적으로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가 작품분석의 핵심이라 하겠다. 
미술관에 선우라는 젊은 화가가 등장하면서 이 극은 진행된다. 그는 어떤 위대한 아름다움과 만남을 이뤄보고 싶은 바람으로 오래 전부터 명성이 있는 이 미술관을 찾게 된 것이다. 그는 오자마자 미술 관장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되지만 미술관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사람들은 벽에 붙어있고 저녁 종소리만 울리면 늙은 주인은 아래로 뛰어 내린다. 그는 미술관에 대해 모든 것이 궁금하지만 주인이 강한 빛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주인이 미술관의 실체와 그 속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속임수를 쓴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 이 극은 극의 시작 전에 `흐왕`이 미술품을 훔쳐간 걸로 설정되어 있는데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흐왕`이 무서운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키가 9척 장신, 이마엔 날카로운 뿔, 무지막지하게 센 힘, 당신은 이 순간 그 긴 손을 우리에게 뻗쳐서 낼름 한 놈 집어다가........”
작가 자신이 이 극을 우리 한국의 현대사로 규정했다는 점과 또한 이 극이 1975년도에 발표된 작품임을 고려해 볼 때 ‘흐왕’은 바로 일제의 침략을 상징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흐왕’에게 미술품을 다 빼앗긴 주인은 통곡해 보지만 그것을 되찾기에는 무능력하다. 그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미술품대신 인간이 더 아름답다는 논리로 사람들을 벽에 진열해 놓게 된다.
나암 : 주인이, 그 태양이란 분이 안됐어요. 몽땅 잃어버리고,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선우 : 안 됐어요.
바악 : 통곡하시고, 의아해 하시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시다가.
기임 : 들어봐요, 흐왕에 대한 나의 고백을.
조오 : 쉿, 너무 무섭게 하지 마
나암 : 결국 묘안을 생각해내신 겁니다. 잃어버린 그것들을 대신 할 수 있는 건 뭘까? 무엇이 이 세상에서 예술품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일까?
기임 : 난 하겠어
조오 : 하지 말라니까
나암 : 인간이다. 인간만이 대신할 수 있겠다., 이렇게 단정하신 거죠. 그래서 우리들을 수집하여 이 미술관에 진열해 두셨습니다.

 

 

서진석의 무대스케치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 는 70년대 이강백 희곡의 성과가 집약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군중의 폭력성, 희생자의 처벌, 권력자의 음모를 유기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형상화 작업은 군중과 희생자 혹은 군중과 권력자의 상관성에 대한 폭넓은 고찰을 가능하게 하고, 권력의 진정한 창출 경위와 군중의 역할에 대한 주목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 결론은 군중이 결코 우매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며, 오히려 권력이 군중으로부터 창출될 뿐만 아니라 권력자의 음모까지도 군중이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전환된 인식은, 군중과 권력의 상관성을 고찰해나갔던 70년대 이강백 희곡의 최종 결론에 해당한다. 이강백은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를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단 한편의 희곡에 담아 보겠다는 거창한 욕심 에서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자술을 깊이 참조해서인지, 이 작품을 한국 현대사의 충실한 굴절로 이해하려는 시각이 우세한 것 같다. 비록 작가의 창작의도가 함부로 무시되지 말아야 할 참조사항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작품 해석의 향방을 전적으로 가늠하는 필요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작품의 성패는 내적 구조와 심층적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에서 판가름 나야 한다. 또한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는 '알' '파수꾼' '내마' 의 구조를 일부 차용하고 집약적으로 응용한 작품이다. 따라서 70년대 현실적 상황과 지나치게 밀착된 해석 방식도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는 인간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에 선우라는 화가가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미술관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바악은, 인간 미술품들에게 인간다움을 찾아주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주인도 미술관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선우에게 인간 미술품을 대신할 걸작을 요청한다. 그러나 인간 미술품들에 대한 바악의 선동이 거세지자, 주인은 불안을 느끼게 되고 서둘러 인간 미술품을 해방시킨다. 바악이 해방을 공표하기 위해서 자유의 종을 울리게 되면서 미술관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든다. 혼돈을 정리할 목적으로 군중 앞에 제시된 선우의 그림은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킨다. 미술관에서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이룩하려했던 주인의 의도나 바악의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 이 때 바악의 변신이 시작된다. 바악은 내마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인물이다. 내마는 실성과 눌지 그리고 군중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참겠소, 이번에도. 난 당신들을 위해 투쟁해 왔어. 저 벽을 바라보쇼. 당신들이 붙어 있어야 했던 저 벽을 말이요. 돼먹지도 않은 그 짓, 그 노릇이 지겹지도 않았소? 오늘은 해방된 날이요. 당신들은 인간이 됐소. 인간, 인간이! 그럼 좀 더 긍지를 가지란 말이요! 라는 바악의 진심어린 충고는, 내마의 고집스러운 믿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바악의 충정은,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외면당한다. 몰려든 사람들, 바악을 쓰러뜨려 식탁 아래로 끌어내린다. 발로 짓밟고, 주먹으로, 의자로 내리쳐서 그는 거의 죽음 직전에 빠진다. 양철통이 덜거덕거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온다. 자앙이다. 그는 통 속에 바악을 끌어당겨 보호한다. 위의 상황은 군중의 폭력 아래 죽어간 내마의 상황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강백은 내마와는 달리, 바악을 살려낸다. 그렇다면 살아난 내마, 즉 바악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바악은 정의로움이나 인간다움을 중시하던 인물에서 이탈하여, 우매한 군중을 강제적으로 계도하려는 인물로 변모한다. 그는 흐왕이라는 가상적 존재를 이용하여 군중들을 장악할 방법을 궁리해내고, 이러한 계획을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라는 논문으로 정리한다. 이 논문을 작성하는 순간, 바악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된다. 자신이 가지게 된 불신을, 우매한 군중을 개량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대체해버린다. 그는 내마처럼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망각하고, 파수꾼의 촌장처럼 군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단만을 강구한다. 따라서 바악의 변신 이후의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 는 대체적으로 파수꾼의 골격을 차용하게 된다. 또한 울타리라는 권력의 틀 속에 인간들을 가두기 위해서 바악이 구상하는 세부 계획은, 알의 박물관장이 꾸미는 음모와 흡사하다. 바악은 주인의 권위를 훼손시키고, 자앙의 협조를 얻으며, 흐왕이라는 허위와 기만의 메커니즘을 도용한다. 이는 전 왕을 교묘하게 살해하고, 내기를 통해 조력자를 확보한 후, 알에 공룡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심리를 가중시켜 왕권을 장악하는 박물관장의 권력 쟁탈 과정과 대동소이하다. 결국 바악은 다섯의 선장이 그러했고, 파수꾼의 촌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위기 상황을 이용해 군중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한다. 이러한 통제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가 해방을 기념하여 준비했던 자유의 종은, 밀항자들의 경보 종처럼, 내마의 정의의 손처럼 본래적 의미와 쓰임새를 잃어버리고 권력자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 는 70년대 이강백 희곡의 성과가 집약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의의가, 이러한 집약 효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바악을 권력자의 무대적 전형으로 삼아 통제되고 감시되는 군중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바악의 권력 쟁취가 군중의 무언의 동조와 암묵적 합의에 의해 가능했음을 시사하는 데에 더욱 커다란 역점을 두고 있다. 그 증거는 작품의 후반부에 속속 나타난다.
자앙 :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소. 다만 그들은 모르는 체 할 수도 있단 말이요. 왜냐면 바악, 이건 재미있기 때문이요. 한때 그들은 저 벽을 즐겼었소. 그들은 이제 이 울타리를 즐길 거요. 더구나 갇혀 있다는 건, 붙어 있었던 그들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것 아니겠소? 그럼 바악, 당신 계획은 뭐가 될 것 같소? 바보요, 당신은. 당신만 우스워진단 말이요. (폭소를 터뜨리며) 이건 모순이요. (손을 허공에 뻗으며) 그래서 내가 저 종을 올려야겠소
자앙은 군중들이 권력의 허위 논리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이러한 자앙의 통찰력은 옳은 것으로 증명된다. 현명한 자앙은, 군중과 지배자 간에 존재하는 무언의 합의를 이해하고 있었고, 군중이 우매하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호합의가 궁극적으로는 군중과 권력자 간의 비밀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군중은 이러한 비밀을 염탐한 자에 대해,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발동한다. 이 작품에서 자앙을 죽인 살해자는 바악이지만, 바악이 행한 폭력이 군중과 질서라는 거대 명분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악은 군중의 일부이다. 르네 지라르도 군중의 힘이 일시적으로 권력 기관을 넘어서는 때가 있음을 지적했다. 즉, 군중은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해 보이지만, 정치적 명분과 권력자의 뒤편에서 권력을 조정하는 절대적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인도, 바악도, 권력의 진정한 중심일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살해당한 자앙과 마찬가지로, 희생양의 반열에 오르거나 조만간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이다. 권력 유지와 질서 재건이 다시 집단의 목표로 설정되면, 또 다른 권력자와 군중의 무언의 합의가 가동될 것이고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될 대상으로 이들이 거론될 것이기 때문이다.
군중의 숨기고 있는 힘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바악,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미완성 그림을 텅 빈 벽의 한가운데 붙인다.
잉태한 여인의 모습이 굵직한 선으로 대강 그려져 있다. 그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잠자코 누워 있으나, 모두들 눈을 뜨고 있다. 바악은 그 눈 뜬 사람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바악 : 모두들 눈을 뜨고 있었군.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소?
사람들 : 태어나던 그때부터요.
기임 : 그래요, 우린 합의를 봤지요.
조오 : 태어나던 때, 그 처음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고요.
여기서 눈을 뜨고 있다는 의미는, 군중이 바악의 허위 위기 조장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권력의 생성 과정과 변화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권력을 유도하고 암암리에 조정해 왔을 가능성도 암시한다. 이러한 군중의 고백은, 이들이 권력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그 존재방식을 용인할 만큼 구조적 메커니즘에 정통했다는 것을 뜻한다. 정리하면, 지금까지 믿어지던 대로 군중이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중이 권력을 주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적 전환은, 이강백이 70년 희곡을 통해 꾸준히 진전시켜온 군중과 권력의 상관성에 대한 최종 결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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