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백하룡 '전명출 평전'

clint 2023. 8. 28. 13:22

 

 

<전명출평전>은 프롤로그, 에필로그, 해설자를 사용한 서사극 형식이다. 극진행이 매우 빠르게 비약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실적인 감정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자칫 서사극이라는 극작술의 기본 설정이 약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시된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보면서, 이 이야기를 통한 교훈을 도출할 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사극 형식은 이 작품의 가장 기본적인, 따라서 본질적일 수도 있는 특징을 이룬다. 극 내부에서 사실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순간들에도 서사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삽입하고 활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해설자의 무대 적 등장 빈도가 더 높아져야 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이후 실제로 극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반영되어 해설자 개입의 빈도가 최초 원고에서보다 높아진다. 이 작품 속의 시간은 1979년부터 2009년까지의 근 30년의 세월을 아우르고 있다. 작품 서두에서 전명출은 서른 살이며 후반부에서 전명출은 예순 살 가량이다. 결국 전명출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하여 1979년 10월에 서른한 살이 된 대한민국과 거의 같은 나이를 지닌 인물이다. 따라서 전명출은 대한민국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삼십년의 시간은 1970년대 말에서 현재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역사의 시간이다. 1979년은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하는 10.26 사태가 일어나던 해이다. 극은 이 후 삼청교육대와 아파트 건설이 붐을 이루는 80년대를 거쳐, 90년대 3당이 합당하는 야합의 시대, 그리고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는 시간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4대강 사업이라는 국민을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이 벌어지는 오늘날에 이른다. 결국 2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삼십년의 대한민국 현대사의 시간이 펼쳐져야한다.

 

 

 

시간이 대한민국의 역사 자체를 말해준다면, 공간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공간 전체를 대변한다. 다만 이 연극은 대한민국 현대의 가장 대표공간인 서울을 직접적인 무대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서울은, 삼풍백화점 붕괴처럼 원경으로 나타날 뿐이다. 합천은 인간다운 삶이 가능했던 공간으로서의 옛 농촌과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해지지 않아 근처의 공업화된 도시로 사람들이 떠나가고 식당이나 하면서 지내는, 그리하여 예전에 비해 황폐화된 삶의 공간이 되어버린 농촌 - 이때 농촌은 반드시 시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삶의 공간을 의미한다. - 을 보여주는 데 유용한 공간이다. 극공간은 합천에서 시작하여, 울산으로 그리고 - 대구가 원경으로 암시되면서 - 다시 합천으로 돌아온다. 구체적으로는 합천(농촌, 마을건조장) - 1970년대 현대조선,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대한민국 공업입국의 상징인 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 방어진의 기적은 바로 현대로 대변되는 한국 근대화의 기적) - 다시 합천(88년 합천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마을, 더 이상 농사짓지 않고 한정식 집, 여관) - 그리고 명출이 야반도주했다가 다시 돌아온 합천 (길식의 매운탕 집, 순님의 순두부집, 황강 변 자갈밭과 축사)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공간성 그리고 시간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수몰되기 이전의 공간/수몰 이후의 공간, 10.26이전의 시간/ 그 이후의 시간의 구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순님이 항상 들여다보듯이,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강조 되듯이, 되돌아가고 싶은 혹은 다시 건설해보고 싶은 그 시간과 공간을 현재의 황폐한 시공간과 대비하는 것이 작가가 진정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매우 빠른 공간과 시간이동을 구현하기 위해서, 암전이 거의 없이 빠르게 한 시간, 공간으로부터, 다른 시간, 공간으로 비약이 가능할 수 있게, 무대를 다 구획의 구조물로 구성하였으며, 이 구조물은 기본적으로 짓다가만 축사, 마늘건조장, 그리고 아파트 건설현장을 효과적으로 구현하였다. 배우들은 자신의 감정을 중폭하기보다는 매우 빠르게 이 시간의 흐름을 타면서 대시를 처리하였다. 긴 이야기의 시간성 속에서 산만하고 장황해질 수 있는 극 흐름을 이처럼 빠른 장면 내 연기방식과 장면연결방식은 극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인물들은 거의 퇴장이 없는 전명출을 제외하고는 미세하게 이 세월의 흐름을 연기적으로 반영하였다.

 

 


전명출평전인 만큼 전명출이라는 인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전명출이라는 인물의 변화 과정에 주제가 집중되어 있다. 전명출은 에필로그에서 이야기 하듯이 언젠가, 특정할 수는 없는 어떤 시절에 아름다운, 아주 눈부시게 환한 사람이었다. 그는 농민이었고, 영농후계자, 새마을운동 등의 단어 혹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믿은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겉으로는 농업을 중시하면서도 실제로는 공업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리하여 배고픈 전명출은 미늘 한 접을 훔친다. 그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 버둥거린 것이지만 사회는 이런 그에게 매우 폭력적이었다. 이제 전명출은 이 폭력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전명출은 점차 '인간다움'을 잃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을 유지하던 그에게 삼청교육대에서의 폭력은 그마저도 '저버린 인간' 아닌 '인간'이 되도록 만든다. 그는 이제 정말 '금수’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 것인가? 그를 다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는가? 전명출 아니 대한민국을 다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는 없는 걸까? 이것이 작가가 던져놓는 메시지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매달려 있는 전명출'을 이미 죽은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내 놓으면서 작가는 다시 한 번 이 질문을 관객에게 제기한다. 우리는 이제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인가요? 우리가 전명출을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요?
전명출은 “사람 살려!"를 외친다. 살려달라는 이 절박함이 대한민국의 외침이다. 그렇지만 순님은 짐승 같은 남편 전명출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말한다. “남편 아닌가?" 대한민국이 타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라면, 살려달라는 외침이 우리들 자신의 외침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일원으로서, 관객들 자신의 외침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 환하게 눈부신 모습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것은 소 스무 마리를 꿈꾸던 시절의 모습이며, '아이스케키'가 녹는 줄 모르고 짚가리에 숨겨놓던 시절의 모습이다.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에필로그 장면에 전명출의 유골함을 들고 오는 장례식을 중심이미지로 구현함으로써, 연출은 에필로그 장면에서 전명출의 죽음을 더욱 더 강조한다. 이 부분은 자칫 건조해질 수 있는 서사극적 흐름에 강한 감정적 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무대 구조물에서 돌출무대로 이동식 구조물을 상어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돌출무대 공간은, 이전에도 명출의 아내가 모텔 에어컨에 매달린 남편을 발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장 환멸스러운 명출을 발견했던 그 공간에서, 다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 두 장면은 서로를 반추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연출에 의해서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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