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코너 맥퍼슨 '뱃사람'

clint 2023. 8. 17. 19:12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지방에서 건축업자 운전기사를 하던 샤키는 최근 시력을 잃은 술주정뱅이 형 리차드를 돌보기 위해 더블린 북쪽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샤키는 3일째 금주하느라 애쓰는 중인데, 리차드와 술친구인 아이반이 전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신 집안에는 술이 넘쳐흐른다.

크리스마스에 마실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돌아온 형제는 다시 아이반의 방문을 맞고, 샤키의 전처와 현재 동거중인 니키를 초대한 일로 형제는 다툼을 벌이는데 문제의 인물인 니키가 미스터리한 록하르트라는 사람과 함께 도착한다. 다섯 남자는 함께 술을 마시며 카드 게임을 시작하고, 포커판의 판돈은 계속 커지면서 록하르트는 샤키에게 그의 영혼을 가지러 온 악마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작가는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과연 구원을 받음직한 그럴만한 존재일까? 에덴에서 쫓겨난 이래 별로 그래 보이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 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알콜에 찌들고 눈이 멀고 아내에게 쥐어 터지면서 스스로의 삶을 망쳐 버리기만 하는 불쌍하고 한심한 모습들이다. 그래서 극중의 악마는 이렇게 말한다. '그 분마저도 질려버린 거야, 그 분마저도 널 잊어버린 거지, 그래서 네가 내 차지가 된 거야.' 하지만 이 극은 말미에 다른 결말을 제시한다. 착오라고 하기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악마는 푸념한다. '누군가 자네를 크게 봐줬군. 저 위의 누군가가 당신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렇게 인간은 구원받고 '버러지 같고 똥파리 같은 인간을 더 사랑하는 그분'을 의아해하며 악마는 떠나간다.

그럼, 이 극은 단순한 크리스마스 성탄 특집극일까? 인간은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데 단지 신의 은총으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걸까? 공연 끝까지 계속되어질 나의 의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기독교적인 배음 속에서도 이교도적인 요소들을 곳곳에 포진시켜 이런 질문들에 화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극의 인물들은 분명 남루한 인생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난 그저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걸 원할 뿐이요, 마음의 평화! 라고 쓰디쓰게 내뱉는 악마의 말처럼 이 극 속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다. 신의 은총도 이런 그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새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끔 허락해주는 것이다.

 

 

더블린 애비 극장에서의 아일랜드 초연을 앞두고 극작가 코너 맥퍼슨은 '런던이나 뉴욕 관객보다 아일랜드 관객들이 뱃사람'을 더 잘 이해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런던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격찬을 받은 '뱃사람'은 맥퍼슨에 따르면 다른 나라 관객들은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일랜드 관객의 마음을 건드릴 작품'이다. 그의 말 대로, 알콜이 들어간 '뱃사람'의 세계- 희망과 운명이 흩뿌려진 황량함과 절망- 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일랜드 인이라면 단박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유머와 웃음의 순간들은 냉혹하고 음울한 현실(reality)과 대비되어 두드러진다. 작품의 배경인 크리스마스가 특히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명절이지만 희망, 평화, 감사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움, 폭력, 논쟁이 횡행한다. 아무튼, 여러 면에서 '뱃사람' 온 가벼운 웃음을 쏟아내는 절망 그 자체의 어두운 이야기인 '뉴욕 동화(Fairy Sile of New York)'의 연극판이라 하겠다. 알콜중독인 더블린 주민 샤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최근 눈이 먼 형 리차드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샤키는 3일째 술을 끊으려고 애쓰는 중인데, 리차드의 술친구인 아이반과 니키가 한잔하며 카드놀이를 하러 들른 집안에는 술이 넘쳐흐르고 있다. 미스터리한 록하르트라는 인물이 도착하면서, 판돈은 점점 커지고, 록하르트가 실은 샤키의 영혼을 데리러 온 악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뱃사람'은 아일랜드 문화에 푹 젖어 있는 작품이다. 맥퍼슨의 이야기는 위클로 지방의 '헬파이어 클럽(지옥불 주점)' 이라는 유명한 설화에서 유래하는데, 사탄이 카드게임이 한창인 그곳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 아일랜드 설화를 출발점 삼아, 맥퍼슨의 시적이고 자유로운 산문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이는 우리들이 알콜과 맺는 관계를 탐색한다. 인간을 함정에 빠뜨리는 술의 능력: 인간의 모순적인 매너 그리고 종교적 상징들에 대한 인간의 의존, 또한 이 작품은 희망과 구원에 대한 연극이다. 히스테릭할 정도로 우스운 장면들이 많지만, 그러한 웃음은 침울한 현실로 인해 불편하게 부각된다. 다른 나라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사랑스럽고, 술에 취하고, 아일랜드 악당적인 면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아이반의 끔찍한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들으며 히스테릭하게 웃어대겠지만, 아일랜드인들은 못나고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그림을 보며 불편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곳 맥퍼슨의 세계에서, 알콜은 모든 사람을 덫에 빠뜨리고, 등장인물들의 술에 취한 모습들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맥퍼슨은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술의 능력을 저주하고 있다. 자신의 악마들과 사투를 벌이는 샤키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이고 문자 그대로 진실로 눈을 뜨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희곡의 다른 세 인물들은 술로 눈이 멀었는데 아이반은 안경을 잃어버렸고, 니키는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며, 리차드는 시력을 잃었다. 샤키는 또한 악마를 알아보는 유일한 인물이고, 그의 동료들은 푹 빠져 있는 술의 세계에 감각을 상실했다희망은 극 내내 솟아나지만, 맥퍼슨의 신작은 그의 주요 테마인 침울함과 절망을 통과해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통찰을 빌린 일련의 작품들 중 마지막이 될 듯하다. 34살의 작가가 언급한 대로, 모든 등장인물 안에 그 자신이 들어있다.

 

 

코너 맥퍼슨의 등장인물들은 규칙적으로 자신 안의 악마들과 사투를 벌인다. 이제 이 반짝이고 서스펜스 넘치는 신작에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은 악마 자신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전적으로 설득된 건 아니지만, 맥퍼슨은 다시 한번 자신이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멜랑콜리한 아일랜드 남성성에 대한 정확한 분석가임을 증명해 낸다. 맥퍼슨의 무대는 핀터의 '귀향(The Homecoming)' 처럼 삭막한 남성성을 분출하는 황량한 더블린 지하방이다. 그리고 이 더블린 집에 사는 사람들은 두 명의 까칠한 형제다. 최근 실명한 리차드는 술병을 달고 사는 괴팍한 중년이고 샤키는 이제 형의 도우미로 찌그러든 불안정한 루저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 리자드의 술친구인 아이반과 니키가 수수께끼의 이방인인 록하르트를 데리고 들리는데 그에겐 뭔가 밤의 기운이 감돈다. 록하르트는 악마 자신인데, 카드 게임을 해서 샤키의 영혼을 데려가려고 왔다는 걸 드러내려고 뭔가 본질적인 것을 내버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초자연적 요구는 작가로 하여금 술이 넘쳐흐르는 남자들의 세계의 정신적 불모성을 드러내려는 장치일 뿐이다. 두 형제는 고전적인 주인-노예 관계를 형상화할 뿐 아니라 내내 술에 취해 있고 와이프한테 쫓겨난 아이반은 술로 인한 과실로 두 가족의 죽음을 초래하고 멍청한 놈팽이인 니키는 샤키의 애인을 훔친다. 어리석은 사람만 결말을 얘기할 것이다. 아무튼 구원은 영리한 나레이티브상의 트릭을 통해 너무나 쉽게 도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탁월함은 맥퍼슨이 솜씨 좋게 만들어낸 캐릭터들의 디테일에 있다. 예를 들어, 리차드의 화난 까칠함은 창문을 닦으면서 들여다본 결혼에 대한 의견을 통해 요약될 수 있는데, 그건 일련의 좆같은 관계들이란다. 그리고 독백에 대한 맥퍼슨의 전설적인 재능은 지옥을 영원한 자기 혐오로 묘사한 장면에서 생생하게 전시된다. 강철 같은 갈색 양복 차림의 악마는 "우리가 있는 곳은 지옥"이라고 주장하는 말로우의 메피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킨다. 맥퍼슨의 비전 속에서 우리는 잘못된 자극물()을 통해 자책감과 실패들을 완화하려다 무리 자신의 지옥을 만들어낸다. 이 마음을 사로잡고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연극에서 진정한 악마가 있다면, 그건 악마 같은 술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거친 세상 속에서 거친 방식이나마 구원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그리고 그러한 구원의 문제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라는 익숙한 이야기 전통을 끌어들인다. 예컨대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방문한 현대판 메피스토펠레스인 록하르트의 존재라든가, 빈 술병이 굴러다니는 난장판 한편에 불을 밝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 연인으로부터 배달된 크리스마스 카드, 비록 철 지난 유행가이긴 하지만 악마가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음악소리가 극의 마지막 장면에 아침 햇살과 함께 울려 퍼지는 장면 등은 기존의 어둡고 음울한 코너 맥퍼슨의 작품이 한결 따스하고 관조적인 여유를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극중 악마인 록하르트가 인간을 질투하며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 구제불능이며 인간 말종이라는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동생인 샤키의 구원자 역할을 하는 형 리차드가 악마와의 한판 게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결말을 통해 코너 맥퍼슨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맹목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악마인 록하르트마저도 이 극에서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록하르트는 영락없는 알코올 중독자이자 도박 중독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록하르트가 샤키에게 내뱉는 긴 고백의 대사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끝없이 헤매는 알코올중독자의 내면의 목소리로 듣는 이의 마음을 묘하게 흔든다.

술과 자기연민과 자기혐오에 빠진 중년 남자들의 세계, 이들에게 더 이상 흘러 넘치는 청춘과 낭만 따위는 없지만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건조한 희망은 남아있다. 샤키에게 배달된 크리스마스 카드가 환기시키는 중년의 사랑이 쓸쓸하면서 아름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CONER MCPH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