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봄, 광활한 차밭이 한눈에 보이는 암자에서 홀로 수행 중인 여산은 차밭을 관리하는 이 부장을 통해 운화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친딸이자 조카이면서 보살인 핏줄.... 실로 그 기막힌 인연 앞에 파란만장한 과거사를 돌이켜보는 여산의 기억은 30년 전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오민호의 시대로 돌아간다. 당시 그의 연인은 인사동의 전통찻집인 〈다담〉의 주인이자 다도선생인 윤정혜. 그녀는 광주민중항쟁이 있기 1년 전 동생 기준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민호를 만난다. 기준의 선배이자 복학생인 민호는 국내굴지의 차 회사인 〈동서다업〉의 가업을, 양자로 들어온 형 진호가 물려받은 것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는 이로, 지적이면서도 성숙한 정혜를 처음 본 순간 반하게 되고 그녀 또한 정중히 호감을 표하며 다가오는 민호가 싫지 않다. 그러나 이듬해 봄,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어갈 무렵 대학을 졸업한 민호가 졸업반인 기준과 함께 야학을 운영하며 광주에 머물게 되면서 잔인한 운명의 서곡이 시작되는데…….
5. 18 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다담〉으로 정혜를 만나러 온 민호는 어이없는 오해로 그녀를 형의 연인으로 오인하게 된다. 결국 그 오해를 미처 풀지 못한 민호는 5. 18 항쟁 속으로 뛰어들게 되고 도청의 마지막 날 그의 눈앞에서 기준은 무참히 죽어간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계엄사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민호. 그런 민호를 구한 건 항쟁 중 그가 구해준 한 계엄군의 증언과 진호의 재력 및 부친이 다져놓은 인맥 덕분이다. 한편 민호가 계엄사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비로소 짝사랑해 온 정혜와 동생과의 관계를 알게 된 진호는 자신의 충격을 삭히고 기꺼이 정혜에게 민호의 간병을 부탁한다. 차밭 근처 한옥에서 극심한 후유증으로 발작을 일삼는 민호를 정성껏 간호하는 정혜와 그런 정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진호의 사랑. 정혜에게 민호가 동생 기준의 흔적을 기억하려는 애착이라면 진호에게 이들 두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보듬어 안고 가야할 혈육 같은 존재이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이른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 초 봄, 차츰 호전되어 가는 민호지만 한결 같은 정혜를 볼 때마다 기준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형을 배반한 듯한 미안함, 무엇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만큼 상처 입은 심신의 고통이 낳을 미래의 암울함은 새로운 강박관념이 된다. 결국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밤,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만든 끔찍한 고문과, 앞서 떠난 이들을 배신하면서까지 살고자 했던 양심에 대한 악몽을 매장하듯 정혜를 범하고만 민호는 모든 인연을 접고 그곳을 떠난다. 그렇게 정혜의 결을 떠나 세상을 떠돌던 민호는 해남 대흥사 근처에서 만난 선승인 일정과 연을 맺게 되는데 출가하는 순간까지도 정혜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지 못한다. 진호 역시 굳이 그런 사정을 민호에게 밝히지 않은 채 모든 업을 씻듯 정혜를 설득해 아내로 맞이하고 그런 비운의 숙명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운화다. 엇갈린 운명의 서리 속에서 영롱히 피어난 차 꽃이라는 의미의 이름, 운화가 네 살이 되던 해 봄, 민호는 아이의 출생 비밀을 극적으로 알게 되나, 이미 승가대학을 졸업한 그는 여산이라는 법명을 받은 승려의 몸이었고, 설상가상 상처투성이인 동생을 승려로 거듭나게 해준 고마움으로 차밭을 종단에 기중할 의사를 밝히고 돌아가던 진호마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로 인해 형의 천도 재에서 마주한 형수를 이젠 보살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산과 죽어도 잊지 못할 마음속의 연인에게 합장으로 예를 올려야 하는 정혜 그런데 오직 서로를 위해 선택한 그 엇갈림으로 아비 없이 자라야했던 철부지가 어느덧 결혼을 앞두고 여산을 찾아온 것이다. 여전히 숙부로만 알고 있는 그에게 혼주 역할을 부탁하는 운화와 그를 고사할 수밖에 없는 여산. 순간 그의 심상에 홀연히 나타난 스승 일정이 일갈한다. "보고 싶으면 보고픔을 보면 될 것이고 그리우면 그리움을 안으면 될 것이다. 졸리면 자거라, 칼을 버리라 일렀거늘 꿈마저 버렸더냐?”
이미 오래전 입적한 스승을 통해 마침내 차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닌 것처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여의 진리를 깨달은 여산. 마침내 그는 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해 긴 세월 동안 탁발승으로 떠돌다 인도로 떠나기 전 일정이 설한 "땅에서 쓰러진 자, 그곳에서 일어서야 한다”는 지눌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것을 자신이 풀어야 할 업으로 반아들 이게 되고, 드디어 운화의 결혼식 날,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정절 녀가 되지 못하고 망부 앞에서는 끝내 수절 녀가 되지 못한 정혜와 재회한다. 식이 끝나고 나면 보살의 이름으로 기억될 이생의 연인. 하지만 정혜가 손수 지어 선물한 새옷을 돌려주며 다시 바꿔 입은 낡은 승복의 의미와 사철을 잃은 뻐꾸기 울음소리 속에서 내생을 기약하는 사랑을 확인한 이상 여한이 없는 만남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5. 18기념관을 찾은 여산은 전시실 앞에서 한 낯익은 사람과 재회한다. 항쟁 당시 계엄군이었던 최 중사다. 그치열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로 인간이기를포기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생명의 은인이며, 역사는 이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하지만 피에 젖은 땅을 딛었던 죄를 속죄하며 사제가 된 최 중사, 아니 이제는 최 신부에게 여산은 담담히 연민어린 인사를 나누며 기준과 야학 제자들이 묻힌 묘지를 찾는다. 눈이 시리게 푸른 5월의 어느 날, 30년의 세월을 돌아 처음으로 망월동을 찾은 여산을 그리운 얼굴들이 반긴다. 차마 신앙으로도 극복할 수 없었던 마지막 짐을 부려놓은 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듯 환히 미소 짓는 기준과 서럽게 죽어간 숱한 넋의 환영....
작가의 글
인스턴트식 만남과 헤어짐이 어느덧 쿨 하다는 표현으로 자리 잡은 요즘, 사상과 시대를 초월하는, 사랑이야기는 그저 추억 속의 유물처럼 구시대적인 향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랑만큼 소중한 것은 없고, 그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선을 실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는 칸트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지난 역사의 뒤안길에서 풀잎처럼 쓰러져 간 무명인들의 삶과 죽음에 숭고함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타적 선택을 스스로 행했기 때문이 아닐까? 5. 18 광주민중 항쟁과 다도(茶道)를 접목한 〈푸르른 날에〉는 1980년대의 시대적 암울함과 맞물린 주인공들의 구도적 삶의 역정을 통해 사랑의 숭고함을 지향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마주볼 수 있는 따뜻한 세상, 차별 없는 평온한 세상의 부활을 희구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좌우하는 전체적인 축은 운명과 숙명을 들 수 있다. 최소한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운명이라면 친구나 연인, 스승 등이 이에 속할 것이며, 그러한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로는 자신이 속한 국가나 출신 지역, 혈육 등이 해당될 것이다. 나 역시 태생적인, 혹은 숙명적인 여건상 여전히 심적 부담으로 자리 잡고 있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기억은 다시 되돌아보기에 가슴 아픈 역사의 편린이 아닐 수 없다. 결코 적이 될 수 없는 동포끼리 적대시 되어야 했던 그 시절, 청운의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서러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간 푸른 넋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또한 죽음보다 끔찍한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생존자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푸르른 날에〉는 아주 가끔씩이라도 그런 안타까운 의문을 가져 본, 아니 최소한 그런 의문이라도 가져주길 바라는 이들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사실 5. 18 당시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었던 세대들은 뜨거운 피를 뿌리고 간 그들의 유지가 무엇인지 잘 모를 터이지만 적당히 달고 부드러운 믹스 커피에 큰 불만이 없는 대중처럼 설령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이 무례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역사는 세대를 거쳐 유전하지만 세상은 세기의 눈으로 급변하는 것. 피로 물든 태양을 기억하는 5월의 하늘도, 캠퍼스의 괴담처럼 번지는 엽기적인 사건도 타인으로부터 익명의 모욕을 받아 살의를 느끼는 것보다 덜 분노하는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손가락 하나로 접수할 수 있는 인터넷 상의 정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푸르른 날에〉는 광주민중항쟁의 와중, 꿈과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이 구도와 다도를 통해 지켜 온 순애보다. 무거운 주제이긴 하지만 기구한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 행위까지 불사하는 주인공들이 오랜 세월동안 지켜온 이타적인 사랑이 빛을 발해 결코 비통하지 않은 한국적 정서가 깃든 아름다운 작품이 될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도 '앵무새 리코와 알파' (1) | 2015.11.10 |
---|---|
이상범 '한단고기' (1) | 2015.11.10 |
선욱현 '해를 쏜 소년' (1) | 2015.11.09 |
김두용 '마지막 20분동안 말하다' (1) | 2015.11.09 |
김의경 '대한민국 안중근' (1) | 2015.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