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위기훈 '몽양, 1919'

clint 2023. 7. 12. 09:06

 

 

<몽양, 1919>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몽양 여운형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1919년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선보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19년 이후 몽양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을 큰 줄기로 삼았는데 그 시기가 1919년보다는 해방정국, 1945년 이후를 중심배경으로 한다.

사실 몽양 여운형은 임시정부부터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심인물이었음에도 사회주의 활동경력 때문에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작가가 선택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여운형에 대한 소개와 상세한 삶의 면면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예상하게 하지만 작가는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했다. 작품 속 중요한 사건들을 해방기로 한정한 것이 중요한 포인트였다. 이 시기 여운형은 김규식, 안재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하게 된다. 해방은 나라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다 보니 화합보다는 반복과 분열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정치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새로운 국가에 대한 논쟁은 쌍방간 욕설로 변질되던 때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여운형은 분열되고 반목하는 현실 담론을 어떻게든 중재하려고 애썼고, 회색분자라는 비난을 들어도 새로운 국가건설에 힘을 합쳐보자는 제안을 좌우를 가리지 않고 펼쳐냈다. 작가는 바로 이 시기의 여운형을 집중한 것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활동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열과 대립, 반목이 일상화된 당대 상황을 전제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정도, 얼마만큼 분열되어 있었는지, 또한 얼마나 서로 소통하지 않았는지를 위해서 <몽양, 1919>는 제각각의 논리를 제시하고 토론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1919년 임시정부 시절부터 1945년 해방 이후까지 좌익과 우익은 끊임없이 반목하였는데, 여운형은 좌익과도 긴 토론을 했고 우익과도 긴 이야기를 했다. 왜 합작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도 서로의 시선은 평행선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 국은 암살당한 여운형의 최후는 지금껏 화합해본 적이 없는 우리의 역사를 그대로 보는 듯한 아픔을 준다.

여운형이 살아 있다면 6.25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지막 자막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작가의 문제의식에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몽양, 1919>는 반복되는 분열과 대립, 그것이 더 첨예해지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여운형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여운형의 자세와 세계관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작가가 넌지시 질문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글 위기훈

2019년 올해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국가독립과 겨레 자유를 선언하여 최초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지 100년이다. 제 기능을 못한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100주년으로 선언하는데는 마땅히 3.1혁명이 있다. 3.1혁명의 파급력은 현대 어떤 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당시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영향을 끼쳐 '독립운동'까지 중국, 인도, 필리핀, 대만 등에 수출되었고, 우리 민족 피 끓는 청년들이 맨발로 국토를 종단, 만주를 거점으로 한 무장독립투사를 자청한 계기였다. 그 중심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몽양 여운형이 있다.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14개조의 전후 처리 원칙 중 하나다. 이 민족자결주의에 소련의 레닌까지 가세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몽양은 파리강화회의가 조선독립을 위한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상으로 조직해, 영어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했다. 같은 시기 일본사주로 이완용이 독살했다는 소문 속에 고종황제가 사망했다. 반일감정이 극대화되었다. 조선 안팎에 독립 운동가들이 동요했다. 만주에서 대종교 인사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일본도쿄 YMCA강당에선 학생들이 2.8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천도교에서는 오래된 동학농민운동 연장선상에서 전 국민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개신기독 교, 불교와 연대를 이루었다. 이는 발 빠르게 해외 거주 동포들한 테 전해져, 마침내 1919 3 1, 온 민족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몽양 여운형이 3.1운동의 시발점이라 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 는 그런 영웅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몽양이 3.1 초석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대한독립 만세!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독립은 거세당했고, 26년 후 8 ·15해방을 맞고도 우리나라는 둘로 갈라진 국론 아래 민족상잔의 6.25 민족전쟁의 비극과 마주했다. 갈라진 국론을 하나로 묶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몽양의 노력은 이후 군사정권, 독재정치 아래 조명조차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몽양의 이름조차, 존재조차 모르는 것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기형의 국가체제를 온 국민이 받아들이면서 독재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분단 상태아래 히스테릭한 반공주의, 악용된 유교문화, 경쟁이 정당한 사회구조가 고착되면서 기이한 권위주의적 한국의 현재가 만들어진 것이다. 독립운동기에 활약한 무장독립운동가, 자본가와 종교지도자, 일제강점 아래 소신을 펼쳐온 언론사들은 해방된 후 본연을 뒤바꾸었다. 권력에 기생하며 일본과 미국을 등에 업은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을 명분삼아 친일, 친미를 내면화 했다. 군벌로, 재벌로, 무소불위 종교단체로, 어용언론사로 정체성을 바꿔 착취, 억압의 사다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3.1혁명으로부터 100.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다 암살당한 몽양. 여전히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암살 배후, 그리고 지금 또 다시 반쪽 나라 남한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국론 양극화, 세대 간의 프레임 전쟁.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론양극화는 6·25전쟁으로, 6. 25는 식민통치에서 주체만 바뀐 독재로 이어졌다. 더구나 지금 일본 역시도 큰 변화의 기점에 있다. 전쟁이 불가능한 나라에서 가능한 나라로서의 법개정을 추진하며, 일왕이 살아있는 최초로 연호를 바꾸어 시대적 정체성 쇄신을 도모하고 있다. 세계정세 역시 자국이익 우선주의로 급변하는 이 시기에 몽양 여운형을 무대화하려는 의지는 시대를 직관한 통찰로 읽혀지며 그만큼 성찰을 요구한다. 일반적인 1인 주인공 서사, 영웅스토리가 아닌 대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무대화를 시도하는 연출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도의 첫 단추를 꿰는 극작의 영광은 무게로 바뀐다.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공연의 진정성이 객석에 전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