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소연 '몬순'

clint 2023. 6. 16. 14:32

 

이소연의 <몬순> '전쟁이야기'. 가제(假題) '전쟁이야기'였다. 허나 전투기 대신 드론이 날고, 무기 대신 사진기를 들고 전장을 누비며, 종전 대신 로그아웃 한다. '우리는 이렇게 전쟁에 연루되어 있구나.' 이소연 작가는 유튜브 생중계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불현듯 생경하게 느껴져 <몬순>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전쟁은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전래의 '전쟁이야기'는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 전장(戰場)을 재현하든, 스펙터클한 전래의 '전쟁이야기'들은 우리가 그 전쟁으로부터 멀디먼 안전한 자리에 있음을 안도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으로, 객석과 무대를 가로질러 극장을 가득 채우는 '몬순'을 쓴다.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에 속지 않고 그 이야기를 이기기 위해 작가 이소연은 새로운 이야기를 썼다.

사실 이야기 짓기는 작가만의 일이 아니다. 함께 읽었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스완』에 따르면,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요약하기를 좋아하고, 단순화하기를 좋아한다.""복잡하고 방대한 정보를 감당할 만한 차원으로 축소시키기 위해 '이야기 짓기'를 일상적으로 동원한다. <몬순>의 인물들도 이야기를 짓는다. 어떤 이들(새벽, , )은 정답을 찾아 명제를 만들고, 어떤 이들(이삭, 리오, 차미)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가공된 이야기를 빚고, 또 어떤 이들(코지, 홀키, 네이지)은 이야기를 딛고 이야기 너머의 현실과 마주한다. 이들의 삶을 가로지르고 있는 전 지구적 전쟁, 그 폭력의 실체를 감당하기 위함일 터다. 그 누구도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그 누구도 그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현재 전쟁 중인 국가출신인 네이지, 코우쉬코지, , 홀키뿐 아니라 게임 회사이자 무기회사인 '몬순'에서 일하는 차미도, '몬순'에서 만든 드론을 가지고 노는 굴도, 전쟁 사진을 찍는 이삭도, 전쟁 소재 VR 작품을 구상 중인 새벽도, 게이이자 난민인 연인이 당한 혐오범죄를 폭력으로 되갚는 리오도 모두 '몬순'의 자장 아래 있다.

'몬순.' 이 작품에서 '몬순'은 다양한 의미로 환유되지만, 무엇보다 관객이 변화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 새벽의 졸업 전시 작품 '몬순'에 담긴 이야기가 흥미롭다. 전쟁의 본질을 질문하는 모범생 새벽은 처음에는 전쟁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이미지로 접근했다가, 점차 '모든 방향에서 모든 사람에게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이 깨달음을 '몬순'이라는 제목 안에 담는다. 그러나 전쟁이 하나의 매끈한 상징에 담길 리 만무하고, 새벽은 실패한다. 기실 비이자 바람이며, 재해이자 축복인 '몬순'은 전쟁에 대한 은유로 환원될 수 없다. 실체는 언제나 상징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몬순>은 이처럼 전쟁을 '몬순'에 빗대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며, 이야기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두께를 상기시킨다. '모자가 그냥 모자'이듯 '문은 그냥 문'이며, 꼭 그렇게 '몬순은 그냥 몬순'이고 '전쟁은 전쟁'인 것이다.

고유한 존재를 보통명사 하나에 욱여넣으며 가해지는 폭력을, 전쟁을 타고 흩날리는 폭력에 에이는 고통을, 그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헤아리는 사려 깊은 작가의 단단한 마침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에, 폭력에 연루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몬순>은 전쟁 당사국으로 설정된 가상국가 타트의 언어로 '여기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제언한다. '전쟁'이 무엇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통해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가 아니겠냐는 듯. 그리고 그 시작은 다른 언어로는 번역될 수 없는, 그 어떤 상징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당사자의 언어로 쓰여져야 하지 않겠 나는 듯. '라가맛트'라고 인사를 건넨다.

 

 

연극 ‘몬순’은 전쟁을 둘러싼 이런 복잡한 고민들을 잘 응축해서 보여준다. 몬순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과 갈등은 결국 전쟁이지만(전쟁의 원인이거나, 전쟁의 결과이거나, 전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동반하는 일들이거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전쟁을 떠올릴 때 생각하기 마련인 전투는 이 연극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은 전투보다 복잡하고, 전투보다 더 오랜 기간 지속된다. 전투는 분명 폭력과 파괴와 살인이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그 참혹한 이미지에만 시선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전쟁의 폭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몬순의 공간적 배경은 전쟁터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A국, B국, C국을 배경으로 한다. A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군수산업체 ‘몬순’에서 일하는 차미는 7살짜리 아들 굴과 살아간다. 차미와 굴의 집에는 전쟁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국가 타트 출신인 네이지가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B국가의 대학원생 새벽은 ‘전쟁’을 주제로 졸업작품을 만드는 중인데 전쟁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타트 출신 교환학생 코쉬코우지, 전쟁 중인 D국가에서 전쟁을 취재하고 있는 친구 이삭과 이야기를 나눈다. C국가에서 아마추어 보디빌더이자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는 리오는 타트 출신 무용수 문과 연인 사이다. 퀴어퍼레이드에서 선보일 연극을 준비 중이다. D국가 출신인 홀키가 그들의 친구다. 이처럼 여러 공간에서, 여러 등장인물들 사이, 여러 갈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만도 복잡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복잡한 이야기는 복잡하게 이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이해하고 재편하는 것은 전쟁이 만든 세계에 대한 저항이 된다.

 

 

전쟁의 서사와 논리구조는 단순하고 쉽다. 폭력은 복잡한 것을 납작하고 단순하게 만든다. 나쁜 놈들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고, 우리는 저 나쁜 놈들은 물리쳐야 한다는 것만이 지상명제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 전쟁의 원인, 전쟁의 과정, 전쟁이 끼치는 영향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같은 전쟁이라고 해도 겪는 사람의 위치와 처지 상황에 따라 다른 맥락의 폭력으로 발생한다. 성소수자가, 전쟁국가 출신 교환학생이, 무기회사 직원이, 대학원생이 겪는 전쟁과 마주하는 폭력이 다르고, 전쟁 중인 국가에 살고 있는 이들과, 전쟁 중인 국가를 방문한 이들,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이들이 겪는 전쟁의 폭력은 다르다.  <몬순>은 전쟁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경험을 복잡하게 얽혀놓음으로써 피해와 가해, 적군과 아군, 승리와 패배 같은 전쟁이 만든 이분법의 세계에 저항한다. 타트에 남아있는 네이지의 가족이 차미네 회사의 제품을 쓰는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이 일로 네이지와 차미의 사이는 멀어진다. 차미는 노동으로 아이를 건사하는 노동자지만 그 노동은 결국 군수산업체를 살찌우는 일이다. 이 군수산업체는 차미가 태어난 나라 타트에서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차미의 존재는 피해와 가해, 침략국가와 침략당한 국가로 나눌 수 없는 경계를 보여준다. 문은 C국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리오는 문이 묻지마 폭행에 대응하는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과 리오는 성소수자 연인이지만 서로의 출신 국가가 다르고, 그 때문에 폭력을 인식하는 방식과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폭력에는 이처럼 성소수자 정체성, 인종 및 출신 국가, 사회경제적 권력 등 여러 층위의 다양한 사회적 지문이 묻어 있다.

 



‘몬순’은 작품 내 군수산업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비를 동반한 계절풍의 이름이며, 새벽의 졸업 작품 이름이기도 하다. 새벽은 자신의 졸업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전 세계에서 발사되고 있는 미사일의 경로를 수집했습니다.(중략) 그렇게 수집된 미사일의 방향을 어떤 것으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컸는데요. 처음 제가 생각했던 전쟁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빗방울처럼요. 하지만 전쟁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정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일까? 그 아래에 있는 사람만이 전쟁을 실감하는 걸까? 그래서 이번에 재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전쟁입니다.”

이소연 작가가 연극 <몬순>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전쟁의 모습을 새벽의 설명을 통해 말하고 있다. 미사일로 표현된 전쟁에서는 떨어뜨린 사람(침략국)과 땅에서 미사일을 맞은 사람(피해국)만 존재하는 평면적인 이분법의 세계라면, 수직낙하하는 빗방울과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동반되는 계절풍 몬순으로 표현된 전쟁은 2차원 평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세계가 된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을 쓰기가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없습니다. <몬순>은 그만큼 저에게 벅차고 조마조마한 작품이었나 봅니다. 항상 작품이 자식 되지 말고 나는 또 부모 되지 말자고, 우리 거리 좀 두고 살자고. 주문처럼 외우면서도 내내 넘어지지 말아라, 주위 살피고 다녀라, 해 끼치지 말아라, , 이 녀석, 뚝심을 좀 가져라! 잔소리를 해대며 길렀습니다. (애들은 대체 언제쯤 다크나요?)

언젠가 피디님께 <몬순>으로 해외공연을 꼭 해보고 싶다고. 그런 창피한 소릴 했다고 고백합니다. 글을 쓰며 이전보다 멀리, 좀 더 멀리 있는 누군가를 상상했다고. 이런 감상적인 변명을 또 적어 봅니다. 들여다 봐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분께도 감사합니다.

2023년 봄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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