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광해군이 그의 죄 값을 묻는 사약을 뒤엎어 버리고...
오랜 세월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김씨가
비로소 통한의 세월을 뒤로 접으며 광해군의 죄를 묻는다.
임진왜란 피난길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그들의 짧은 만남은, 아버지 선조 임금의
변덕과 들썩이는 여론의 아첨과 모략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악연으로 얼룩져 버렸다.
꿈에서도 씻어내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끝없는 역모설의 소용돌이와
거세게 밀어붙이는 여론의 힘에 밀려 동복형인 임해는 물론, 나이 어린 영창대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광해군의 죄의식은 확대되고, 그는 상궁 개시와 함께 깊은 구중궁궐의 한 후미진
방에서 위험한 놀이에 빠져든다.
모반의 세력들은 점점 더 조여오는데 광해는 아버지 선조가 16살 어린 김씨(훗날 인목)을 만나던
순간을 재현한다. '어디사는 누구라? 나이가?'
권력의 탐욕스러운 속성에 침을 뱉으면서도 권력의 한가운데에 백성을 세웠던 임금 광해...
반정세력 무사의 날렵한 칼끝이 광해의 턱에 닿았을 때 그는 말한다.
“누구냐? 능양군이 새 임금으로 올랐느냐?
내가 조카에게 한 말씀드린다. 고단한 자리에 앉느라고... 수고하셨소.”
조선시대에 집권했던 임금으로서 쿠데타나 정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조(祖)나 종(宗)의 시호를 받지 못한 채 군(君)으로 격하 당한 경우는 노산군과 연산군, 광해군, 이 셋이다. 이 중 노산군 즉 단종은 세조와 더불어 역사극의 주요인물로 등장해왔고, 일방적으로 매도된 역사적으로 불우한 왕이다. 퇴위할 때까지의 과정으로 크게 나뉜다. 연산군은 최근 <문제적 인간 연산>이나 <이> 같은 연극을 통해 문제적 인물로 부상했다. 반면 광해군은 극적인 인물로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역사학자인 한명기의 저서 <광해군(역사비평사, 2001)에 따르면 광해군은 임진왜란 직후 부국강병을 통해 나라의 자존을 지킨 유능한 왕이었으며,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왕이었음에도 인조반정 이후에 쓰여진 기록들 때문에 이러한 최근의 역사학계의 논의와 견준다면, 극단 물리의 제5회 정기공연인 임은정 작, 한태숙 연출의 <광해유감>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광해군의 또 다른 진실이다. <광해유감>의 내용구성은 광해군이 34세에 즉위할 때까지의 과정과 즉위 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서자였고 그의 아버지 선조도 서자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엉겁결에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세자 지위에 있었던 17년은 불안과 공포, 좌절의 세월이었다. 서자이고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명나라의 고명을 얻지 못했고, 광해군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잦은 변덕과 시험에 시달려야 했으며, 어린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의 견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선조의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한 광해군은 즉위 후 자신의 동복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다. 결국 <광해유감>은 서자로서 태어나 아버지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결핍, 그 결핍 때문에 더한 결핍과 죄의식을 짊어지게 되는 슬픈 인간으로서의 광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글 - 임은정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광해군이 폐위되었던 진정한 이유. 인조를 세운 서인 세력들이 반정의 명분에 설득력을 부여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광해군이 그의 서모 인목대비를 폐출시켜 인륜을 거슬렀다는 죄목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시작하면서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관계를 역사의 기록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었다. 얼핏보기에도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운명에 치명적인 존재였다. 나는 아버지 선조와 계모 인목대비, 그리고, 서자 광해군을 삼각관계로 묶어 이유 없이 광해군을 핍박하는 선조의 밑바닥에 잘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질투와 권력에의 집착을 그려 넣고자 했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넘긴 불안한 보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기들을 하나씩 죽여야 했던 광해군의 비애를 깔고 그의 업적을 조명해보고자 했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지난 97년, 2002년에야 비로소 구체적인 공연을 준비할 수 있게 된 내게 광해군은 조금 더 강한 인물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리는 광해군 역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인물은 아니다. 신하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명분을 앞세워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다해 군사를 파병해야 한다는 여론을 다스려 시대를 앞서는 중립외교를 펼친 임금이면서도 영창대군과 연흥부원군의 죄를 물어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를 수용하고 결국 폐모살제의 죄를 얻은 임금. 그리고 그의 폐위 이후 수백년 동안 인륜을 거스른 폭군 광해군으로 조명되었던 임금. 이 연극을 통해 뛰어난 통찰력의 광해군이 놓치고 갔던 인목대비와의 악연을 조명해보고 싶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밤에 광해군이 군사를 풀어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만 제대로 내렸어도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왕권이 아니었는데 10년이나 유폐되어 목소리조차 잊고 있을지 모르는 인목대비의 원한이 궁지에 몰린 오합지졸들이 일으킨 어처구니없는 거사에 힘을 실어주고 말았다. 권력에 의해 각색될 수밖에 없었던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에 비중을 두고 그려보고 싶었고, 끝으로 한가지 더 욕심을 낸다면, 축복 받지 못한 임금 광해군이 조선에는 축복이었다는 아이러닉한 상황에 대해서도 조명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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