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수미 '스카프와 나이프'

clint 2023. 3. 11. 09:17

 

스카프를 두른 50대 여자와 나이프를 품은 30대 여자가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공항에서 만난다. 두 여자는 각자의 시간에서 기다리는 것이 있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건 사람일 수도, 지나간 시간일 수도, 지워져 가는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비행기가 도착하기 전까지 서로가 위안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들은 기다리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두 여자가 공항에서 마주친다. 트렁크 하나를 놓고 내 것이네 네 것이네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단순히 일상적 해프닝인양 보이는 것도 잠시, 과거를 향한 회한의 감정이 두 인물의 공통점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식칼을 소지한 다소 어수선해 보이는 여자는 바람난 남편을 맞닥뜨리러 공항에 나왔다. 고상한 몸가짐에 스카프를 두른 또 다른 여자는 유학을 떠났던 20대 아들을 마중 나왔다어디 론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맞으러 나왔음에도 두 사람 모두 트렁크에 매여 있다. 나이프는 집을 나서면서 트렁크에 온갖 옛날 물건 잡동사니를 넣어왔다. 나름대로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정리라고 불렀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과거의 시간에 대한 미련을 의미한다. 남편을 살해하겠다는 극단적인 계획 자체가 아직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로 갈 것도 아니면서 트렁크에 집착하는 것은 스카프도 마찬가지다. 작품 초반, 자신의 사라진 트렁크를 찾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스카프는 자신이 트렁크를 아예 안 가지고 온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가져가버린 것인지 반복해서 기억을 되짚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무대 위 트렁크가 단순히 일상의여행가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명확해진다. 가장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기억이다.

짧은 시간 동안 둘은 타인에서 가벼운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사이로, 밥 친구를 거쳐 술친구로 발전한다. 둘 중 세상을 더 오래 산 스카프는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는 나이프를 다독이고 그녀의 닫힌 관점을 환기시킨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의 순간에 나이프의 잡동사니 가득한 트렁크를 끌고 나가버린 것도 스카프였다. 두 낯선 여인들은 이전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의 고통을 서로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처음에는 나이프가 언니인 스카프로부터 일방향으로 위로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스카프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타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유학간 아들이 마지막으로 보내줬던 음악을 나이프와 함께 듣게 된 스카프는 마침내 그 아들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밝힌다.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먼저 출국한 남편이 남들의 눈을 의식했던지 아무에게도 아들의 자살을 알리지 말라고 단속했던 것이다. 스카프의 회한은, 아들을 믿는다고만 반복해서 말했을 뿐 그의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알지 못했다는 것, 더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스카프와의 대화를 통해 나이프는 자신의 무모한 행동이 자신은 물론 아들의 삶까지도 망쳐놓을 것으로 생각이 미친다.

 

 

나이프와 스카프는 굳이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고 헤어진다. 나이프는 스카프와의 우연찮은 만남으로 자신과 자식의 삶을 위해 남편 살해를 단념하고 스카프 또한 지인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낯선 이로부터의 인간적 위로에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 장면을 피날레로 삼지 않았다. 나이프를 보내고 홀로 앉은 스카프는 곧 장남과의 전화를 통해 둘째 아들이 죽은 것이 오늘이 아니라 1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자신의 위로로 나이프와 그의 남편, 그들의 아들까지 구원한 스카프야 말로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참척의 고통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스카프에게는 더 긴 치유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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