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청춘 남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그린<바르샤바의 멜로디>를 멜로드라마로 규정한다면 본전도 못 찾는다. 눈시울 적시는 사랑이야기를 신파로 매도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이 작품에는 '사랑'을 뛰어 넘는 강력한 전하량이 존재한다. 애틋한 로맨스의 용기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짜릿한 전율,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고서 멜로를 언급한다면, 성급하거나 건조 한 것이다. 그 첫째 이유. 1966년 쓰인 이 작품은 1967년 초연 이후 수많은 극장에서 상연된다. 2차 대전 종전 20년 후 여전히 전쟁의 상처가 쓰라리게 아려오는 시기에 극작가 조린은 느닷없이 러브스토리를 꺼내들었다. 그것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애잔한 사연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매진 행진이 이어졌고, 상연 극장마다 인파로 미어터졌다.

<바르사바의 멜로디>는 순식간에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고, 어느 순간, 소련 시대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무릇 흥행대작은 시대의 코로 대중의 코드와 은밀히 공모하기 마련이다. 러시아 민중의 넋을 빼놓은 이 작품에는 그들만의 기질과 그들만의 감성과 그들만의 환상을 제대로 포척하고 있다. 멜로의 통속보다는 민족성의 자력이 더 강하다는 말이다..
두 번째.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겔랴와 빅토르는 고등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이팔청춘 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큰 슬픔 때문에 지나치게 조로해버린 애늙은이다. 2차 대전의 최대의 피해국인 러시아와 폴란드의 선남선녀란 설정과 이들이 지속적으로 전쟁의 상흔에 대해 얘기하며, 그 고통을 기억하는 것을 보라. 겔랴가 지닌 본능적 불안감은 아우슈비츠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고, 늘 결정적 한 방이 부족한 빅토르의 숙맥 천성은 청년기의 꿈과 낭만을 차압한 전쟁의 고단함 때문이다. 사랑이되 이른 영혼의 사랑이고, 이별이라면 시절을 탓해야할 비련이다. 역사가 내팽개친 이 시대의 고아들 앞에서 멜로는 사치스럽다.

셋째는 작가 레오니드 조린에게서 찾아야 한다.<바르샤바의 멜로디>는 전쟁 직후인 1946년, 스무 살 무렵에 만난 겔랴가 빅토르가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결별을 하게 되고, 30살이 될 무렵 폴란드에서 재회한 다음, 40살 무렵 모스크바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라 함은 이들을 헤어지게 만든 법률, 1947년 스탈린이 공표한 외국인과의 결혼금지법을 말한다. 수백만 명을 숙청한 스탈린의 두 번째 공포정치 결과물이다. 조린이 이 작품을 창작하던 1966년은 스탈린 사후 10년간의 정치적 자유시기, 소위 해빙기가 끝나고, 스탈린주의자 브레즈네프의 보수정치가 개막(1964년 집권)되던 시기이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흘러가는 듯한 불안감과 불편함. 조린이 그린 것은 감성이라기보다 차라리 역사였다. 조린의 사랑이야기가 아프고 목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아픈 역사, 목메는 역사 때문이다.
<바르시바의 멜로디>는 폭풍우 같은 사랑이지만, 절규도, 몸부림도 없다. 오직 텍스트 기저에 놓인 피맺힌 살갗의 통증만 감지될 뿐이다. 실로 놀라운 절제력이다. 한편으론 잔인하고 무심하다. 울고불고 미어지는 한국인의 정서와 는 딴판이다. 역사드라마조차 멜로에 상납하는 축축한 사막 형 한국 연극에 비하면 이 작품은 건조하고 바짝 마른 축축함이 매력이다.

레오니드 조린
1924년 11월 3일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출생. 소년시절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10살 때 (1934년) 작품집을 출간했다. 아제르바이잔 국립대학과 고리키 문학 연구소를 졸업한 후, 1949년 첫 희곡<젊음>을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상연한다. 이후 거의 매년 희곡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사회적 문제와 그 첨예한 갈등을 날카롭게 충돌시키는 작품을 주로 집필했다. 1953년엔 풍자 희곡<솔직한 대화>를 발표했으며, 1954년 발표된<손님들>에서는 관료주의를 신랄하게 폭로했다.<남의 여권>(1957)에서 조린은 정직함과 진실함의 문제를 제기했으며,<화창한 5월>(1958)에서는 교묘한 속물성과 외면적 도덕성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의 이중성을 묘시하고 있다. 풍자코미디<선인들>(1959)은 학계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차 없이 조롱하는 한편, 서정드라마<제때에 만납시다>(1960)는 신세대의 성격과 운명을 그리려 했다. 이후 1967년<바르샤바의 멜로디>, 1969년<스트레스>, 1974년<포크롭스키 문>, 1977년<낯선 남자>, 1985년<인용>, 1992년<알렉세이 공작>, 2009년<장엄한 코미디>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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