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신여성 김명순은 식민지 조선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살아온 작가다. 기생 출신 후처의 딸이라는 차별의식, 강간사건의 피해자라는 트라우마, 남성 지식인 작가들의 공격과 비난, 그로 인한 조선문단에서의 축출과 배제 등이 그의 여성으로서의 삶,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을 집요하게 질식시켜 왔다. 그리고 그에 저항하기 위한 대항적 글쓰기가 그의 고유한 자전적 글쓰기 형식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자기 변명적, 자기방어적 글쓰기 방식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노라라는 반항적 여성 이미지도 그렇게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 소설, 희곡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처지를 설명하고, 변명 내지 옹호하는 말하기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곡 <두 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기정은 모두 작가 김명순의 자전적 삶을 토대로 탄생한 인물들이며, 그들은 한결 같이 작가 자신의 뼈아픈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금욕주의적 연애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의 금욕주의적 연애사상은 당대 젊은 지식인 남녀들 사이에 유행했던 엘렌 케이의 연애지상주의에 근거를 둔 일원론적인 영육(靈肉)일치 연애관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육(肉)적 연애에 대한 병적 거부와 영(靈)적 연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라는 왜곡된 연애사상의 추구는 김명순 희곡의 여주인공들이 지닌 의지적 행동인 동시에 작가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일그러진 연애사상은 자신이 남성에게 당한 육체적 훼손이라는 트라우마와도 연관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면 금욕주의 연애를 추구하는 여주인공들의 시도가 패배와 좌절로 귀결되는 파국을 보여줌으로써 문학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억압적 여성 현실을 폭로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작가 김명순이 1920년대에 두 편의 희곡을 창작했다는 것은 한국 희곡사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여성작가에 의해 씌어진 희곡 자체가 매우 드문 현실에서 여성 극작가가 직접 신여성 주인공을 통해 당대 신여성이 처한 연애와 결혼에 관한 담론을 극적 형상화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명순 :
필명은 탄실(彈實) 또는 망양초(望洋草). 평안남도 평양 출신. 평양 갑부 김가산 소실의 딸이다.
1911년 서울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잡지 『청춘(靑春)』의 현상소설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少女)」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19년 동경유학시절에 전영택(田榮澤)의 소개로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신문기자(1927)를 역임한 바 있고, 한때 영화에도 관여하여 안종화(安鍾和) 감독의 「꽃장사」·「노래하는 시절」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39년 이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그곳에서 작품도 발표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동경 아오야마정신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 중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설 「칠면조(七面鳥)」(1921)·「탄실이와 주영이」(1924)·「돌아다볼 때」(1924)·
「꿈 묻는 날 밤」(1925)·「손님」(1926)·「나는 사랑한다」(1926)·「모르는 사람같이」(1929) 등이 있으며, 시작품으로 「동경(憧憬)」·「옛날의 노래여」·「언니 오시는 길에」·「석공(石工)의 노래」·「시로 쓴 반생기」 등이 있다.
신문학 최초의 여성문인으로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여자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많이 남겼다. 개인적인 생활의 고뇌와 사랑의 실패 등으로 인하여 불우한 삶을 살았으나, 창작집 『생명의 과실(果實)』(1925)을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금욕주의적 연애와 결혼생활의 단적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희곡 <두 애인>이다. <두 애인>의 무대 역시 김명순 희곡 특유의 낭만적 호사 취미가 잘 나타난다. 무대는 ‘화려한 중류 이상의 가정 대청’이며, 대, 소도구로는 탁자와 책상, 책들, 살구 꽃병 등이 놓여있어서 중산층 지식인 가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두 애인>의 여주인공 기정은 결혼을 한 기혼여성이지만 남편(주인)과는 일체 육체적, 성적 관계를 갖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다른 기혼남성들을 연인으로서 흠모하는 여성이다. 그는 남편과 순결을 조건으로 한 계약결혼을 한 상태로서 히브리주의자(청교도주의자) 김춘영, 사회주의자 이관주(리관주)를 애인으로 두고 그들과 영적 연애를 하고 있다. 히브리주의자 김춘영과 사회주의자 이관주가 기정의 영적 ‘애인’인 셈이다. 이러한 기정의 금욕주의적 연애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두 애인의 부인들로부터 모욕과 망신을 당할 뿐 아니라 폭행을 당하게 된다. 김춘영의 부인에게 폭행을 당해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를 못 쓰게 되고, 이후 다시 이관주의 부인에게 사진틀로 폭행을 당해 눈과 머리를 다쳐 몸져 눕게 된다. 마침내 금욕주의적 연애의 추구에 실패한 기정은 남편의 품에서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기정과 그의 남편은 기정의 ‘금욕주의 연애’ 이상(理想) 때문에 갈등을 빚고 있다. 남편은 ‘공상누각’과 같은 ‘금욕주의 연애’의 이상에서 벗어나 ‘화평한 가정’의 현실로 돌아오길 기대하지만 기정은 순결을 조건으로 한 계약결혼이라는 ‘약속된 조건’을 강조하며 남편의 기대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더 나아가 남편의 간절한 소망을 거부하는 대신에 그는 자신이 숭배하고 흠모하는 청교도주의자 김춘영, 사회주의자 이관주 등과 정신적 연애를 추구한다. 기정이 김춘영과 이관주을 사모하고 숭배한 것은 그들의 인격과 사상 때문이며, 그들에게 관능적 쾌락이나 결혼을 기대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정의 이상을 그의 남편은 비현실적인 ‘공상누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두 애인>의 여주인공 기정은 유모의 간청에 못 이겨 ‘사랑 없는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강한 주체의식을 가진 신여성이므로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이른바 ‘노예적 매음생활’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연애대상을 추구함으로써 주체적 삶을 살고 있지만 결국 그들의 부인들의 폭력에 의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두 애인>은 기정의 삶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엘렌 케이 식 연애지상주의자 신여성이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결국 처절하게 패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김명순은 금욕주의 연애를 추구하는 여주인공들의 시도가 패배와 좌절로 귀결되는 비극적 파국을 형상화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억압적 여성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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