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낙형 '훼밀리 바게트'

clint 2023. 3. 5. 19:28

 

서자 출신인 요섭은 24시간 편의점 훼미리 바게트 지점장으로

10년 가까이 이곳에서 근무해왔다.

사장인 그의 부친과의 약속이행이 순탄하다면 머잖아

지부장으로 승진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요섭의 부친과 적자인 형의 음모로 녹주라는

아가씨가 매장에 근무하게 된다.

그녀는 언뜻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다른 세계 속에 빠져있다.

녹주의 방심으로 도난품은 급증하고 취객들은 난장판을 이룬다.

요섭은 고리대금 빚을 지게 되고 급기야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불법비디오 제작으로 그 이자를 감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요섭은 녹주에게 사랑을 느낀다.

요섭은 갈등 끝에 그녀를 녹화하다가

사랑하는 녹주가 남성임을 알고 이성을 잃는다.

 

 

 

24회 서울연극제의 공식초청작인 ‘훼밀리 바게트’는 24시간 편의점 ‘훼밀리 바게트’에서 만나는 여러 인간군상의 모습을 통해서 이 시대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라는 연출가 기국서의 말처럼 분비물이 넘쳐나는 서울의 자정 거리를 여러 독립된 이야기로 표현하고 있다. ‘훼밀리 바게트’ 는 ‘남장여자’, ‘몰래 카메라’, ‘폭력과 섹스’, ‘낙태’ 등 세기말의 어두운 단면을 도발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하지만 ‘페밀리 바게트’는 있는 사실만을 단순히 나열하는 연극은 아니다. 개인과 사회의 특수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연극은 이런 현상을 한번 걸러야 하는 ‘필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연출가는 믿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시대를 사는 99년 서울의 살풍경한 모습을 소름 끼칠 만큼 적나라하게 되비쳐낸다. '훼밀리 바게트'라는 24시간 편의점의 깊은 밤과 새벽. 떠돌이 인생들의 휘청거리는 몸짓, 아스팔트에 뱉어진 배기가스 같은 한숨들이 뒹군다. 가게 주인 요섭부터가 성공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없이 배다른 형의 간계때문에 늘 불안해하며 매일 밤 햄버거나 씹는다. 밤이 내리면 그의 편의점엔 도시의 오물 같은 군상들이 몰려든다. '늬들은 부모도 없느냐'고 꾸짖는 어른에게 '없다 왜? 없으면 사줄래?' 라고 대드는 10대들. 노름과 술로 가족을 망가뜨린 뒤 자해 공갈로 목돈을 만져보려는 주정뱅이 군복 사내. 컵라면 한그릇을 구걸하는 어린 소년. 생리대를 훔치는 남자 교수. 연상의 유부녀와 눈 맞은 연극배우. 심지어 편의점 화장실에 아기를 낙태한 여고생까지…. 오늘의 '어둠'을 연극은 능숙한 화법으로 말한다. 도발적인 구어들과 비속어들의 행진은 바로 지금 밤거리에 서있는 듯 생생하다. 무대엔 혼돈과 불안이 가득하다. 뒤틀린 현실 때문에 고리대금 빚을 진 요섭이 '편의점 화장실 몰카 비디오' 제작이란 뒤틀린 방법으로 갚아보려 하지만 일을 더 꼬이게 만들 뿐이다. 그가 겪는 혼돈과 고통의 대미는, 사랑하던 편의점 여직원 녹주의 성 정체성에 관한 충격적 '반전'이 장식한다.

 

 

김낙형 작가의 글

1. 누구나 그렇듯 건강이 좋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디가 나쁜 것도 아닌데 신경이 불안하고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그때 전 쪼그라든 제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오직 기댈 수 있는 생명력이 육신보다 먼저 시들어 있었던 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에 기권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같았고 저로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용하다는 한의사 선생님을 찾아 뵙는데. "약은 무슨 약. 그냥 가! 그 정도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가족이 있으면 한 며칠 같이 지내다 와. 얼렁 가 뭐해?"

2. 최근 일본 쓰쿠바大 연구원들은 경찰과 협조해 인스턴트 식품과 청소년 범죄의 관련성을 탐구했다. 300명의 비행청소년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인스턴트 식품은 25%나 더 많이, 그리고 아침을 거르는 경우는 3배나 더 많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혼자서 아침과 저녁을 먹었다. 아사히 신문의 최근 사설은 사회전체가 아이들의 식생활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면서 오늘날의 일본 식탁은 너무 외롭고 삭막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뉴스위크 한국판 이번 작업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보랏빛 새벽풍경'을 작품의 가두리로 삼고 싶었습니다. 허옇게 쇠어버린, 터질 듯 부풀어 오르다가 멈춰버리면 그 뿐인 우리들의 새벽 말입니다. 그래서 인지 치밀한 분석과 논리적 전개를 요구하는 위의 주제들이 마냥 풍경처럼 나열만 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는 의도적으로 줄거리를 해쳤기에 새로운 무대 이미지가 생성되길 기대해봅니다. 끝으로 흔쾌히 연출을 맡아 주신 기국서 선생님, 거칠고 이 빠진 대사를 떠 맡은 76단 배우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과 관객 여러분들의 식탁 위에 따스한 온기가 넘치길 빕니다.

 

김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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