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갈등과 대립 없는 아버지와 아들이 또 어디 있을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건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인 주도권 장악 욕구 때문이건, 대화에 익숙하지 않고 화해가 서툰 이 관계는 종종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동물의 수컷에 비유되기도 한다. 존재의 주도권을 획득하고 사용하기 위해 이들은 성난 수컷처럼 송곳니를 드러내고 격하게 물어뜯기도 하고, 본능적인 혈육의 끌림으로 서로를 보호하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기도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전형적인 세대갈등을 보여주는 중국의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도무지 어느 하나에서 부딪히지 않는 것이 없다. 아버지는 촌스런 농촌에서 아들은 대도시에서 각자의 생활터전을 잡고 산다. 아버지는 아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살기를 바라며, 그것이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적 취향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선택이 존중받길 바란다. 그는 의사로서 안정된 직업이 있으면서도 더 나아가 창업을 통하여 더 큰 성공을 희망하지만, 아버지가 보기에 이는 허황되기만 하다. 각자의 망연한 환상 속에 살며 인생의 외딴길을 향해 가던 아들이 아버지의 입원을 계기로 같은 공간에서 다시 부딪힌다. 둘의 소통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서로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욕망을 통제하여 가두고 노끈처럼 상대방을 질식시킨다. 각자가 지닌 가치체계는 상대방 으로부터 끊임없이 꺾이고 상처받고 공격당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상대의 선동에 감동 받지도 않는다. 어쩌다 한쪽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저쪽은 거부하고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엇박도 이런 엇박이 또 있을까. 아버지의 기억은 아들의 어린 시절에 고정되어 있다. 귀엽기만하고 대견하기만 했던 아들이다. 그러나 아들은 성장하면서 과거를 잊고 새로운 것으로 무장한다. 중년 이후 하강기에 접어든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면서 그에 대한 기억을 박제해 둔다. 장롱은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의 좋은 추억이 세월 속에 응고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다시 이 장롱은 아들을 옭아매려 설치하는 함정이 된다. 어렵사리 찾아온 화해와 봉합이 무르익을 때쯤 다시 파탄이 오고 최후의 포옹은 그 뒤에야 간신히 이루어진다.
작가 - 구레이(顧雷)
1978년생인 구레이(顧雷)는 베이징이공대학을 졸업한 중국의 과학 엘리트 출신이다. 그는 중국 이공계 대학의 최고 명문인 베이징이공대학에서 생화학공학을 전공했고,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원래는 학부 졸업 후 고향인 스쟈좡의 어느 제약회사에서 연구개발직으로 취업이 확정되었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그가 학부생이던 2001년, 교내 연극동아리 태양극사와 협업으로 <보이체크(Woyzeck)> 를 연출하여 베이징 연극가협회가 주최한 대학연극제에 참가하여 연극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는다. 연극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취업을 포기하고 베이징에 남아 석사과정 대학원 생활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중국을 대표하는 연출가 린자오화의 '자오화 작업실'에서 무대감독 일을 병행한다. 그리고 이 경험과 경력은 그를 연극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정식으로 수신풍극단을 창립하여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개방, 협력, 순수 창작, 고(高)퀄리티를 지향하는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구레이는 자신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하는 작가- 연출가를 고집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속도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람의 마음은 호수입니다. 돌멩이를 던져서 예쁜 물수제비뜨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그 안에다 벽돌을 마구 던져 넣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작품의 숙성과 발효를 매우 중시한다. 이 숙성과 발효는 작가와 배우, 스태프뿐만 아니라 관중들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가 추구하는 연극 공연의 이상을 그는 리마스 투미나스가 묘사한 "외양간 천정의 순정 물방울처럼 관객이 연극을 보고 극장을 나설 때 편안한 밤으로 걸어 들어가 마음속에서 언어로도, 손발의 동작이나 춤으로도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의미심장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연극을 보는 가장 소중한 수확이며, 창작자가 가장 걱정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1978년생인 그는 중국 연극계의 빅네임들보다 한 세대 뒤인 21세기의 소장 작가군에 속한다. 그의 작품은 첨예하고 엄숙한 제재를 취하면서도 블랙 유머가 충만하다. 2015년 중국 연극계 최고의 문제작 <구부상>에서 시작하여 <꿈이 사라질 때(人生不適情)>(2016), <동반자관계>(2017), <진화(進化)>(2018), 그리고 <물이 흘러내린다>에 이르기까지 그는 집요하게 동시대 중국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을 담아 낸다. 동년배의 다른 작가들이 주류 연극으로의 진입을 위해 실적주의에 치중하거나 무대예술의 물량공세에 전념할 때, 그리고 지난 몇 년간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여 온 연극계에 이른바 '주선율'이 넘쳐날 때에도 그는 베이징의 소극장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연극의 길을 걸어왔다.
이 작품은 2020년 9월 베이징 연극가협회가 주최한 베이징 국제청년연극제 출품작이며, 코비드(COVID) 상황으로 인해 연극계 전체가 큰 타격을 입고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항저우(杭州)에서, 그리고 2021년 선전(深圳)에서 상연을 이어갔다. 올해 5월과 6월에는 상하이와 베이징에서의 공연이 예정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레이는 적어도 최근 10년을 두고 본다면 중국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예술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된다. 그의 머릿속과 컴퓨터에서, 그리고 그의 극단 동인들의 곱씹음 속에서 숙성되고 발효되고 있는 후속작은 어떤 것이 될지, 그가 보여주는 중국의 모습은 또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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