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말>은 자오야오민이 공식발표한 첫 작품으로 1983년 5월 연극계총간 9집에 발표되었다. 1981년 봄 상하이연극학원 학생들이 초연을 올렸으나, 얼마 못 가 중지되었고, 1985년 장쑤성화극단 등의 단체 들이 레이궈화 연출로 연합공연을 올린 바 있다.
설원에는 끝없이 펼쳐진 눈과 고장 난 표지판이 있다. 눈으로 모든 것이 덮여버린 세상은 사람들이 다니던 길조차 눈으로 덮여 끊겨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표지판은 마치 풍향계가 되어버린 듯 방향을 잃고 바람 부는 대로 돌아갈 뿐이다. 땅 파는 사람, 불 쬐는 사람, 말 타는 사람, 스키 타는 사람 4인은 각자의 방법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혹독한 겨울을 버텨낸다. 방향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 각자가 살아남는 방식과 각자가 그려내는 미래전망은 혹독한 문화대혁명을 견뎌낸 중국 상황을 은유한다. 절망적이지만 언젠가는 변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자신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땅 파는 사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전망 속에 현재 주어진 물질적 조건을 향유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불 쬐는 사람', 곧 변화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오로지 붉은 말을 기다리며 노래하는 '말 타는 사람', 미래 전망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현재적 생명에 천착하는 '스키 타는 사람'은 문화대혁명을 통과한 중국의 다양한 인간군상과 인간의 본성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한다.
동시에 <붉은 말>에는 개혁개방을 맞아 새로운 에너지가 약동했던 1980년대 초 연극계의 특징 또한 고스란히 담겨있다. 서구 매체의 범람 속에 위기를 맞았던 1980년대 초 중국 연극계는 브레히트와 모더니즘, 실험연극, 부조리극 등을 참조로 삼아 형식적 혁신을 추구하며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주제적으로는 '인간의 재발견'을 추구하던 당시 문화계 흐름과도 궤적을 같이 한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 극좌적 분위기 속에 휴머니즘은 혁명적 실천성을 갖지 못하는 부르주아의 감성으로 치부되었고, 모더니즘, 표현주의 등은 유심론에 입각한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산물로 여겨지며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맑시즘'이 제기되고 맑시즘과 휴머니즘은 상충되지 않는다는 대대적인 논쟁이 일어난다. 이로부터 예술계는 그간 영웅과 악인의 전형을 구축하여 선명한 투쟁을 그려내던 창작론에서 탈피하여 계급혁명 속에 피폐해진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보였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창작되기 시작한다.
<붉은 말>은 자오야오민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자오야오민의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과 이를 형상화시키는 특성은 <붉은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붉은 말>의 알레고리는 중국 사회를 은유하지만, 팬데믹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겨울,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알 수 없는 설원, 그리고 고장 난 표지판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팬데믹 상황, 더불어 사회의 성장동력이 감소하고 확신할 수 없는 미래 앞에 욜로족, 파이어족, 짠테크족, 영끌 족... 수많은 종족이 생겨나는 한국은 지금 <붉은 말>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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