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현숙 '땅 위에 서다'

clint 2022. 4. 12. 14:45

 

 

 

단막극인 [땅 위에 서다]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하던 맞벌이 부부가 사랑을 확인하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남편 이동근은 생계를 위해 화장품 회사의 도안사로 일하는 화가이고, 아내 윤금희는 미용사이다. 이때 미용사는 물질문화를, 화가는 정신문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정신문화를 상징하는 동근마저 물질문화인 상업적 광고 도안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설정은 1960년대 시대 상황을 묘파하고 있다. 1960년대에서 2020년대라는 엄청난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 대신 현실을 좇을 수밖에 없는 현 시대상을 그대로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일상에 쫓겨 자신들의 꿈을 상실하며 살아가던 이들 부부에게 어느 토요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데이트를 신청하는 남편에게 보너스의 액수만 묻는 아내, 생활에 얽매여 남편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던 아내. 그들은 그날 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미장원을 사직할 결심을, 남편은 아내를 이해할 결심을 한다. 그들은 물질문명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잃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물질보다는 사랑이라는 정신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이들 부부의 진정한 화해를 하기 위해서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보다는 오히려 아내의 내조로 남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들 부부의 미래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말 처리는 작가가 60년대 맞벌이부부의 고민이라는 주제를 담는 등의 열린 사고 속에서도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품의 결말을 아내의 사표가 아니라, 남편의 사표로 바꿔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땅 위에 서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땅 위에 서 있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때문에 이 작품에서 땅 위에 선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땅 위에 선다는 것은 하늘이나 지하에서 생활하는 새나 두더지의 삶이 아닌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층빌딩(5)과 백화점(지하)이라는 설정은 부부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 극의 성패 여부는 무대장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무대 장치에 비중을 주는 대신에, 이미 작가의 언급이 있었듯이 미용실과 화방에서의 행위들은 특별한 소도구 없이 손짓과 몸짓으로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박현숙(192661~ 2020128)은 대한민국의 극작가이다.

1950년 중앙대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에 그녀는 한국문화연구소에 현상 작품으로 응모한 수필 <어머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1956년 그녀는 제작극회의 시작을 함께 하게 되며, 1960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항변>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한번 <사랑을 찾아서> 라는 가작으로 입선하게 되고, 그 다음 해에는 같은 대회에서 <땅 위에 서다>로 당선된다. 이러한 연속된 당선 및 입선은 그녀로 하여금 한국 희곡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녀 또한 신인 극작가로서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1963년에서 1967, 그녀는 중앙문학인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3년에서 1971년까지는 제작극회 2대 대표로서 한국 희곡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그녀는 1965년 전일본부인연맹 초청 담론회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과 관련된 발표 진행, 1972년 일본 문화연구 국제회의 참석, 1976년부터 1977년까지의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상임위원 역임, 1988년 미국 버팔로에서 개최된 세계여성희곡작가대회 참가 등 국제적으로도 다양한 연극 관련 포럼, 세미나, 대회 등에 참여하며 한국 희곡계의 위상을 높였다. 이러한 대외적 활동뿐만 아니라 그녀는 대내적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70년부터 12년간 한국문인협회 이사직을 수행하며, 1979년과 그 다음해까지는 한국희곡작가협회 회장직을 겸임했다. 또한 1980년에는 <한국희곡문학상> 제정하고, 1994년에서 1996년까지는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 동안에는 다양한 연극제와 연극인 협회 및 위원회의 자문위원 혹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그녀가 다양하고 영향력 있는 대내 활동에 다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세기가 바뀐 뒤에도 그녀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운영위원 (2000), 한국여성문화 예술인회 고문 발탁 (2003), 한국공연예술원 자문위원 추대 (2006) 등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한국 희곡계를 위해 헌신했고, 그 발전을 위해 상당한 공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희곡계에서 박현숙이라는 극작가의 출현은 큰 의의를 갖는다. 그 의의라 함은 박현숙의 등장이 국내 희곡계에서 여성 작가의 등단과 활동 횟수가 늘어나는 주된 계기로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박현숙이 본격적으로 우리 희곡계에 등장한 196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의 연극 역사에는 여성 작가를 통한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가 추가되었고, 그 당시만 해도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의 보편적인 세계관이 연극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실주의 표현법을 바탕으로 비사실주의 기법을 어느 정도 도입했다. 이는 그녀가 전후의 시대상과 그 후의 혼란을 연극에 쉽게 풀어낼 수 있게 하였으며, 그녀 스스로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을 살려 독창적인 희곡 발표에 성공했다. 이렇듯 박현숙은 한국 근현대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꿰뚫으며 그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최초의 여성 극작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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