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시작되면 춘남 할머니가 진한 보령 사투리를 쓰며 등장.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다.
할머니는 누룩을 빚어 술을 만드는 일을 평생 해왔다.
무대 한쪽의 장독대 항아리들에는 다양한 술이 익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집안 어디에선가 연탄가스가 새는 냄새가 난다며 할머니는 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흰 천으로 구들의 시멘트 사이로 빠져나오는 연탄가스를 막아본다.
춘남 할머니의 이야기는 먼 옛날 할머니가 이 보령에 시집온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어머니는 갓 시집온 춘남의 성질머리가 급하고 고약하니 그것을 다스리려면 소곡주를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시집살이를 시켰다. 조용하고 음전한 성격이어도 소곡주를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시어머니의 말씀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시대에 태어난 춘남할머니는 술 만들고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진리라 여기며 산다. 그러는 사이 믿고 의지했던 시어머니도 죽고, 딱히 크게 믿거나 의지하지는 않았던 남편은 떠나고, 열심히 누룩을 빚으며 키운 아들도 죽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소곡주를 담는다.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며느리가 있고, 며느리가 낳은 손녀 고은이가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모두 손주 자랑에 여념이 없자, 할머니는 어느 날 손녀를 업고 동네 마실을 나간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선거철이라 관광버스가 와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어디론가 데려가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다. 허탕을 친 할머니가 눈이 푹푹 내리는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 보니 며느리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어있다. 그래서 할머니가 홀로 손녀 고은이를 키우게 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어디에선가 들어봤을 법한, 그런 흔한 이야기. 그런데 이런 흔하디흔한 서사를 따라가는 장면의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박은경 배우가 할머니가 되었다가, 시어머니가 되었다가, 며느리가 되었다가, 아들이, 동네 사람이, 삼촌이, 고은이가 된다. 약간의 소품을 더해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방식은 의미심장하다. 술을 빚을 때 사용하던 흰 천이 구들장의 가스가 새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사용하다가 손녀 고은이의 포대기가 되기도 하고, 산골의 집에서 마을을 내려가는 길이 되었다가 망자를 보내주는 영혼 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철학적이다. 삶과 죽음과 가스는 막을 도리가 없구나... 도무지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아보겠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 인간의 삶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지녔지만 결국 또 한 사람의 인간 그 자체인 것이다. 손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불길했던 눈 내리던 겨울밤, 모든 것을 삭히고 소곡주를 빚으며 손녀를 홀로 지켜내는 할머니는 이미지로 보여준다. 위, 아래, 좌, 우, 이쪽 저쪽 사방에서 튀는 누룩을 잡는 누룩 장인 춘남할머니의 손녀답게 탁구 신동이 된 고은이의 탁구쇼는, 느림과 느림, 빠름과 빠름의 움직임과 사운드로 표현된다. 직접 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라 연극만이 가진 매력을 담뿍 담아내어 좋았다. 누룩이 터지는 소리, 고은이가 탁구 치는 소리, 할머니가 돼지를 잡아 마을에 잔치하는 소리... 처음부터 비극임을 말해주고 시작하기에 이런 소리들이 얼마나 슬픈 소리가 될지 예감하게 되어서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말이다. 그때 그 시절 탁구소녀답게 고은이는 늘 짧은 반바지 차림에 티셔츠로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신나게 탁구를 한다. 재능을 인정받아 인터뷰할 때는 사진을 찍는 방향에 따라 몸을 기계적으로 틀어서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 진짜 너무 웃기고 객석에서도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장면이다. 코치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코치님이 긴장이 될 때는... 코치님이 강한 상대를 만날 때는... 코치님이... 잔뜩 긴장해서 미리 준비한 대사를 외우는 고은이. 코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고은이.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여기를 봐주세요, 이쪽이요... 할 때마다 순순히 그쪽을 향해서 서주던 고은이는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 전지훈련갔다가 죽는다. 아마도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고 자살한 것이라 생각된다. 관람한 지인들이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여 놀랐기도. 겨울 전지훈련 장면에서 고은이가 낯선 장소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바닥에 깔린 누룩이자 탁구공들이 빨간 조명을 받아 유흥가의 술집임을 암시하고 이때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라는 노래가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고은이는 무척이나 두려운 모습이었고, 그럼에도 코치님을 거역하지 못했고, 암전이 끝난 이후에는 반바지 위로 하반신을 덮듯 치마를 입는다. 그렇게 소년 같았던 여자아이는 여자가 되어 죽는다.
팡팡 터지는 누룩처럼 터지는 탁구공의 소리. 애간장을 녹이는 소리, 단장이 끊어지는 소리, 마른 눈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의 소리... 얼굴이 예뻐서 고은이고 마음이 예뻐서 고은인데 따듯한 봄처럼 살라고 이름이 춘남인 할머니의 삶마저도 혹독하고 매섭기 그지없다. 물이 불이 되어서 수불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불덩이가 쌓이고 슬픔과 분노의 화가 삭혀야만 몸 안에 술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디선가는 계속 연탄가스 냄새가 나고 할머니는 독주를 빚는다. 그렇게 만든 마지막 인생의 퍼즐 조각은 항아리의 뚜껑이 된다. 자신이 빚은 독주를 마시고 퍼즐 항아리의 뚜껑을 닫고 스스로 장독대로 걸어가 몸을 반으로 꺾어 항아리가 되는 춘남 할머니.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열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작가의 글
나의 가장 오랜 벗인 외할머니가 떠날 채비를 마쳤다. 말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심한 세월을 탓할 수밖에. 때마침 누군가 소곡주를 사 왔다. ‘안 일어나려다 못 일어난다’는 선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할머니도 안 일어나려다 못 일어나는 선비가 된다면 우리와 오래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귀가 번뜩뜨였다.
외할머니는 배추흰나비가 되어 멋지게 날아올랐다 ‘너희 할머니, 어디 가셨니?’ 누군가 물었고, ‘밭에 가셨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누룩이 익어 술이 되듯, 탁구공이 네트를 가뿐히 넘듯, 정성이 하늘에 닿듯, 삶과 죽음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으며 오히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지 않는가. 이짝저짝 편 가를 것 없이 하나가 되어 말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바뀌었으므로 뼈대만 남기고 모두 허물었다.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초상집 개(喪家之狗)’가 되어야 했다. 보령, 가래티 개천에 갈대가 우거졌다. 낯 뜨겁지만 감히 「누룩의 시간」에서 가래티의 볕을 담고 싶었다. 무지랭이 할망구의 케케묵은 색조를 찾고 흠뻑 젖은 등허리의 쉰내를 풍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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