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르지팔’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파르지팔’은 ‘인디애나 존스’부터 ‘다빈치 코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어온 성배(聖杯) 전설을 토대로 했다.
성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포도주 잔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흘린 피를 받은 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토대가 된 원작은 13세기 중세 독일 기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Parzival)’이다,
폐쇄적인 남성 결사인 성배 기사단이 소재인 만큼 이 극에는 여성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2막에 파르지팔을 유혹하는 꽃처녀들이 집단으로 나타나지만 비중이 크지 않다. 무수한 남성 등장인물 속에 유일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과거에 성배 기사들을 유혹하는 역할을 맡아 성배의 왕 암포르타스를 타락시켰던 쿤드리다. 원래는 착하고 온순한 여성이지만 마법사 클링조르가 마법을 걸면 색정적인 여인으로 변해 성배 기사들을 유혹하는 존재로, 아득한 옛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비웃은 죄 때문에 영원히 죽지 못하고 윤회의 사슬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태어나는 여주인공이다. 선과 악의 극단을 오가는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유혹하는 여성인 동시에 구원자인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2막에서 클링조르의 하수인이 되어 파르지팔을 유혹하다가 실패한 쿤드리는 3막 성금요일 장면에서 돌아온 파르지팔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쿤드리는 선왕 티투렐의 장례를 위해 성배 기사들이 최후의 성배 의식을 거행할 때 성배의 밝은 빛을 보며 놀라움과 기쁨 속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기사들은 성배와 구원의 기적을 찬송한다.

대체 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쿤드리를 죽였을까? 한편으로는 벌을 받아 영원히 죽지 못하는 쿤드리를 죽게 해주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늘 그러하듯, 뭔가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여주인공은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때 죽음으로 떠나가야 한다는 강박적 원칙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온 ‘파르지팔’ 새 프로덕션의 연출가들은 쿤드리를 죽이지 않는다. 쿤드리는 성배의 왕좌를 거부한 파르지팔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 떠나가거나 혼자 당당하게 제 갈 길을 간다.
노기사 구르네만츠를 제외하면 이 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죄의식에 시달리며 구원을 갈망한다. 그래서 성배는 구원의 핵심이 된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원작에서 성배는 잔이 아니라 거대한 돌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연출에서도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또는 자궁을 조각한 거대한 석상으로 무대 위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배는 정신적·종교적 충족감뿐만 아니라 소속 구성원들에게 현실적인 이권을 부여한다. 끊임없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마치 신화 속의 신들처럼 기사들을 늙지 않고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이 특권은 기사들 중 누구도 성배 기사단을 떠나지 않으려 하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 파르지팔의 깨달음과 성숙은 성배의 힘과 이권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결핍과 상처로부터 온다. 이 극의 핵심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성배 세계의 선왕 티투렐은 기독교의 유물인 성창과 성배를 얻은 뒤 성배 기사단을 조직해 이 유물들을 지키고 있었다. 성배의 기사가 되고 싶던 클링조르는 그의 사악함을 꿰뚫어본 티투렐이 이를 거부하자, 앙심을 품고 마법으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 뒤 빼어난 미녀들을 종으로 삼아 성배 기사들을 유혹하게 한다. 왕위를 계승한 암포르타스는 클링조르의 왕국을 공격했다가 성창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 그리고 결코 낫지 않는 상처로 고통을 받으면서, 계시 속의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은 순수한 바보’를 기다린다. 처음에 그 ‘바보’ 파르지팔은 왕의 고통을 살피지 않아 추방당하지만, 오랜 모험의 여정과 수련 끝에 연민을 깨닫고 성창을 찾아 돌아와, 왕의 고통을 치유하고 성배의 세계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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