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문학사에서 최초로 성공한 낭만희극으로 평가받고 있는 <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는 1589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1589년에서 1590년 사이에 초연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린 사후인 1594년에 4절판(Quarto)으로 출판되며, 1630년에 놋쇠머리 그림이 있는 표지와 함께 2판이, 그리고 1655년에 3판이 출판된다. 르네상스 극들은 대부분두 개의 플롯을 갖고 있는데 <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도 예외가 아니다. 첫 번째 플롯은 베이컨 수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이며, 두 번째 플롯은 에드워드 왕자와 레이시백작, 그리고 미모의 시골 처녀 마거릿 간의 삼각관계에 관한 사랑 이야기다. 막 구분 없는 총 16개의 장면을 통해 첫 번째 플롯과 두 번째 플롯은 서로 교차적으로 반복되면서 전개되지만 결코 이질적이거나 독자적이지 않고, 서로 교묘하게 연결되면서 마치 하나의 플롯인 양 자연스럽게 발전한다.
마법과 관련된 첫 번째 플롯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단연코 번게이 수사와 밴더마스트 간의 마법 대결과 베이컨 수사가 만든 놋쇠 머리의 발화 장면이다. 마술과 관련된 플롯은 중세 시대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로저 베이컨 수사의 연금술과 마법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자 미상의 작품 <베이컨 수사에 관한 유명한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마법사들의 경이로운 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 박사>의 영향도 엿보인다. 두 번째 플롯은 그린 자신의 연애 담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극이 낭만희극이라는 평가를 받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왕자나 헨리 왕 등 실존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역사적인 관련 사건과는 무관하며 모두 이름만 차용된 것이다. 사냥을 갔다가 우연히 만난 사냥터지기의 딸 마거릿에게 한눈에 반한 에드워드 왕자가 자신을 대신해 절친인 레이시 백작으로 하여금 마거릿에게 구애하도록 하지만 레이시와 마거릿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됨으로써 유발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레이시와 마거릿의 관계를 마법 거울을 통해 알게 된 에드워드 왕자는 레이시의 배신을 추궁하지만, 그 과정에서 왕자는 그 어떤 외적인 힘으로도 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둘의 사량을 허락한다. 그리고 자신은 카스틸의 공주인 엘리노어와 결혼함으로써 두쌍의 사랑이 맺어지는 전형적인 희극의 행복한 결말로 극은 마무리된다

마법과 사랑은 <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극은 당시 영국인들의 마법에 대한 개념과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극에는 3명의 마법사가 등장하는데 영국에서 가장 마법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베이컨 수사와 제2인자인 번게이 수사, 그리고 독일인 마법사 밴더마스트를 통해 그린은 마법이 지닌 힘과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베이컨 수사는 악마를 불러낼 뿐만 아니라 악마로 하여금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게 하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데려가게도 한다. 극 초반에 그는 악마로 하여금 버든 박사가 즐겨 찾는 여관주인 댁을 마법으로 데려오게 하는데, 그녀를 구름 위까지 끌어올린 회오리바람은 바로 베이컨 수사가 발휘한 마법의 힘이다. 베이컨 수사의 명령을 받은 악마는 번게이 수사나 벤더마스트, 혹은 마일스를 등에 태운 채 하늘을 날며 공간을 이동한다. 번게이 수사와 밴더마스트 역시 마법으로 황금 나뭇잎이 달린 나무와 용을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한 마귀와 함께 불러낸다. 마법사들이 부리는 이 같은 마법 행위가 우리에게는 단순한 기술적인 속임수나 허구, 혹은 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당시 관객들에게는 매우 친숙하고 매력적인 현실이고 믿음이었다. <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가 템스강 남쪽의 로즈 극장(Rose Theatre)에서 공연되던 당시의 시대정신이 인간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인본주의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극이 왜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 명의 마법사를 통해 그린은 당시 관객을 매료시켰던 마법의 힘뿐만 아니라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무게 있게 다룬다. 특히 마법거울로 대변되는 베이컨 수사의 마법은 인간관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작가는 어이없는 두 젊은이의 죽음으로 마법의 부정적인 결과를 부각하고 또 연금술을 포함한 마법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거나 추구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는 마법 거울은 에드워드 왕자에게는 레이시와 마거릿의 관계를, 그리고 설스비와 램버트의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들 간의 불화와 살인을 목격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마거릿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우정 그리고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레이시의 본심을 듣지 못한 채 배신감과 분노만 키운다. 설스비와 햄버트의 아들들 또한 마법 거울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만을 보고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서로를 살해하고 만다. 베이컨 수사가 마법 거울을 깨버리는 것도 이 같은 마법의 파괴력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법에 대한 그린의 경고는 놋쇠 머리를 통해 분명해진다. 실제로 로저 베이컨 수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놋쇠머리는 연금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신비로운 지식의 상징이다 이 작품에서 베이컨 수사는 금언을 말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 늦소 머리를 만들기 위해 7년이란 세월을 보낸 것으로 그려진다. 그가 번게이 수사와 함께 잠도 자지 않으며 60일간 놋쇠 머리를 지킨 것도 놋쇠 머리가 곧 금언을 말하고, 또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놋쇠 벽으로 잉글랜드를 둘러싸줄 것이라는, 현대의 관객들에게는 매우 황당한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놋쇠 머리는 얄꽃게도 그가 잠든 사이에 입을 열며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일스에 의해 무시된다. “시간은 있다,” “시간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나가버렸다”라는 놋쇠 머리의 금언은 매우 불가사의하고 깊은 철학을 말할 것이라는 베이컨 수사의 기대에 비해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마치 불교의 회두와 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습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놋쇠 머리의 말은 그에 대한 선문답을 논할 기회를 갖기 전에 놋쇠 머리 자체가 파괴되고, 따라서 베이컨 수사의 7년간의 연구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실망과 함께 좌절을 맛본 베이컨 수사는 마법의 신비에 빠져 절대적인 하나님께 맞서려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어리석었다고 평가하면서 여생을 순수한 신앙심만으로 종교에 정진하리라 맹세하는데, 마법과 관련된 이 같은 베이컨 수사의 웃지 못할 비극을 통해 그린은 절대적인 지식이나 과학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당대 학자들에 대한 풍자와 경고를 중요한 주제로 제시한다.

마법 못지않게 낭만적인 사랑 또한 이 극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린은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는 레이시와 마거릿의 사랑을 통해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특히 마거릿은 뛰어난 미모로 인해 시골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왕자인 에드워드로부터 구애를 받게 되지만, 부와 명예, 권력에 대한 유혹을 이기고 레이시와의 진정한 사랑을 성취한다. 그녀는 돈이나 실크 옷 같은 물질적인 유혹이나 레이시를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다. 심지어 레이시의 배신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도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레이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백작이라는 그의 신분을 알기 전 오로지 인간 레이시 자체에 대한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사랑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마거릿에 대한 레이시의 사랑 역시 신분을 뛰어넘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마거릿에 대한 이 같은 순수한 사랑을 끝까지 지켜 나간다. 그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마거릿이 왕자의 첩이 되는 것보다는 자신의 합법적인 아내가 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뿐만 아니라, 마거릿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왕자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다. 과거 남녀 간의 사랑보다 우선으로 그려지던 남성 간의 우정마저 저버릴 만큼 절대적인 레이시의 사랑이 행복한 결말을 맺게 된다는 전에서 그린이 얼마나 순수한 사랑의 승리를 부각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랑과 마법 이외에도 그린은 에드워드 왕자의 고뇌를 통해 진정한 군주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극의 초반 마거릿에 대한 욕정이라는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권력과 특권을 남용하려던 에드워드 왕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레이시와 마거릿의 사랑을 목도하고는 자신의 행동이 과연 왕자다운 것인지 고민하는데, 이 장면에서 그린은 참다운 군주란 힘으로 남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먼지 자기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남을 통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결국 에드워드 왕자는 자신의 욕정을 가라앉히고 레이시에게 마거릿과 결혼할 것을 허락함으로써 레이시뿐만 아니라 마거릿도 얻을 수 있게 되며, 자신 역시 엘리노어 공주와의 행복한 결혼식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갈등과 반목을 극복한 화해와 평화의 사회가 진정한 군주의 참모습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린은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풍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경고도 엿보인다. 극의 초반부터 베이컨 수사는 시종일관 자신이 마법의 힘으로 잉글랜드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는데, 그 방법이란 바로 놋쇠 벽으로 잉글랜드를 둘러싸는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안전은 놋쇠 벽과 같은 배타적인 애국심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린은 분명히 한다. 놋쇠 머리가 부서짐으로써 베이컨 수사의 오랜 꿈은 한순간 헛된 망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를 놋쇠 벽으로 에워싼다는 생각은 마치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이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는 미명하에 국경에 두르려는 장벽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뒤틀린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린은 과거를 반성하고 종교에 매진하기로 결심하는 베이컨 수사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를 비웃고 있다 그린의 작품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로버트 그린
대략 1558년 영국 잉글랜드 지방의 북동부에 있는 노퍽 주의 주도인 노리치(Norwich)에서 마구장이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1575년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에 입학해 1578년 문학학사 학위를 받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여행한 그린은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작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83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585년 링컨셔주 출신의 여자와 결혼해 아들을 얻는다. 1580년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마밀리아(Mamillia)』를 시작으로 그린은 1588년 『판도스토(Pandosto)』와 『대장장이 페리메데스(Perimedes, the Blacksmith)』, 그리고 1589년 『메나폰(Menaphone)』, 1592년 『필로멜라(Philomela)』 등 주로 시대가 요구하는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일련의 연애 소설을 쓴다. 특히 필립 시드니 경(Sir Philip Sidney)의 『아케이디아(Arcadia)와 같은 기법으로 쓴 『판도스토』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의 『겨울 이야기(The Winter's Tale)』의 원전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 안의 주옥같은 시들은 그린에게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총 5편의 극작품을 썼는데, 1587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아라곤의 왕 알폰서스의 우스꽝스러운 역사(The Comical History of Alphonsus, King of Aragon)』가 아마도 그의 최초의 극작품일 것이다. 1590년 토머스 로지(Thomas Lodge)와 함께 쓴 『런던과 영국을 보기 위한 거울(A Looking Glasse for London and England)』은 그의 두 번째 극작품이다. 그리고 『광인 올랜도(Orlando Furioso)』는 이탈리아의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의 1532년 작품을 번역한 것으로 『베이컨 수사와 번게이 수사』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극작품으로 손꼽힌다. 또한 지럴디 신시오의 『이야기 100선 (Hecatommithi)』을 극화한 1590년 작 『훌로든에서 살해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의 생애(The Scottish History of James the Fourth, Slain at Flodden)』는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와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의 모체가 된 작품이다. 그린은 존 릴리(John Lyly)의 영향을 받았으며, 비록 미미하게 다루어지거나 혹은 무시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와 같은 후배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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