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W. B. 예이츠 '녹색 투구'

clint 2019. 12. 3. 08:14

 

 

 

 

 

예이츠는 고대 아일랜드 얼스터 나라의 전설적인 영웅이었던 쿠헐런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다섯 편 썼다. 그는 쿠헐런의 생애에 관해 평생 동안 큰 관심을 가졌지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쿠헐런의 일대기를 연대기 순으로 쓴 것은 아니다. 예이츠 자신의 생애의 중요한 시기에서 절실한 주제를 주인공의 일생에 빗대어 집필하여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말년에 희곡집을 편집하면서 주인공의 나이에 따라 다시 배열하여 영웅의 일대기로서 일관성과 완성감을 부여하려고 했다. 최종 희곡집의 배열순서는 주인공의 영웅적 입문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의 우물에서(At the Hawk's Well), 녹색 투구, '볼리야의 바닷가에서, 이머의 단 한번 질투, 쿠헐런의 죽음의 순이다.

 

 

 

 

 

혈기 방장한 청년 쿠헐런이 동장하는 매의 우물에서가 주인공의 영웅적 운명으로의 입문을 다룬 작품이라면, 녹색 투구는 주인공이 얼스터 사회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객관적인 인정을 받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극은 세 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삽화는 서로 연결되어 주인공의 영웅성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삽화는 얼스터의 최고의 용사에게 주어지는 녹색 투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세 용사 - 쿠헐런, 리어리, 코널 - 사이의 경쟁이다. 쿠헐런은 이 경쟁 구도를 큰 도량과 현명한 판단으로 해결을 모색하는데, 그는 투구를 쟁취의 대상이 아닌 화해의 잔으로 만들어 그 속에 술을 채워 공평하게 돌려가며 마시자고 제안한다. 둘째 삽화는 서로 먼저 실내로 들어오려는 부인들의 다툼이다. 쿠헐런은 아내 이머가 먼저 들어오려는 것을 막고 경쟁 용사들이 각자 벽에 구멍을 내어 세 부인이 동시에 들어오도록 하여 갈등을 해결한다. 셋째 삽화에서 목 베기 게임에서 목을 빚진 리어리와 코널에게 목을 내놓으라는 붉은색 남자의 요구에 쿠헐런은 게임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조국의 명예와 진 빚은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도리를 지키기 위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내민다.

세 삽화를 통해 예이츠는 쿠헐런의 도량, 현명함, 공평함,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투구쟁탈전은 그치지 않고 경쟁자들뿐만 아니라 부인들과 하인들까지 가담하고 쿠헐런은 다툼을 그치게 하려고 다툼의 원인인 투구를 바다에 던져버리지만 부인들의 다툼과 하인들의 소란은 계속된다. 결국 이 다툼은 주인공에 걸맞은 상대역이자 초자연적 존재인 붉은색 남자의 개입과 판정으로 그친다. 그는 쿠헐런이 주저함 없이 목을 자르라고 내밀자 목을 자르는 대신 투구를 씌어줌으로써 쿠헐런을 진정한 챔피언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투구쟁탈전은 주인공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극적 고안물이다.

진정한 영웅의 자격은 대의를 위한, 사심이 없고 계산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예이츠는 현대 아일랜드에 주인공이 상정하는 미덕인 자기희생에 바탕을 둔 고결함과 명예감을 되돌려놓으려고 했다. 주인공은 가장 강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영웅의 자격을 인정받는다. 예이츠는 이 극에서 서로 탐내는 분쟁의 투구를 모두가 돌려가며 마실 수 있는 화해의 술잔으로 만들려는 사람, “홍하거나 망하거나 웃음을 거두지 않는사람, “모두로부터 배신당해도 더 독해지지 않는 마음을 지닌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으로 제시하고 있다.

 

W. B. 예이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