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원종 '플랫부쉬 애비뉴'

clint 2019. 10. 6. 12:37

*1996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이 작품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시 · 청각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공간화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힘 가진 자들이 미끼로 제공한안락하고 아름다운 주거지역과 공원 사이에 방치된 플랫부쉬 애비뉴라는 곳을 무대 공간으로 삼는다. 게다가 흉측하고 녹슨 철골 구조가 무대를 제압하고, 철골구조 세트와 무대 바닥, 객석에 다수의 모니터를 설치, 선과 색을 이용, 형태를 변화시키는 등의 방법이나 양식적인 움직임, 소리의 증폭, 단조로운 리듬의 가속, 소리의 변형 등으로 주로 그로테스크한 표현들을 비교적 세세히 서술했다

작품은 프롤로그 : 이유, 1. 갈증, 2. 만남, 3. 비밀, 4. 거절, 5. 대가, 에필로그 : 플랫부쉬로 대구조를 구성한다. 얼핏 각기의 주제로 독립된 장들을 만든 듯 보이나 사실은 개념적인 단어들이 연결되어 극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사건들도 연대기적 시간성에서 논리적인 연계를 맺고 있어 그리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앞서 지적한 공간화 될 요소들과, ‘검은 옷이라는 등장인물이 후기 산업사회의 흉물스런 모습이나 개인을 파괴하는 힘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제시되는 한편, 태고와 자유,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일에 몰두하는 여자, 사회속에 조화롭게, 주도적 인물로 들어가길 원하는 남자 등 세 가지 극적 요소가 극의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제목을 우리 독자에게 낯선 플랫부쉬 애비뉴라고 지어, 먼저 의문을 갖게 하고, 대사 중 수차례에 걸쳐 그곳의 성격 - 인간들과 차들이 지나가는 곳, 먼지 쌓인 채 시간이 정지된 곳, 무언가를 기다리다가 떠나는 곳 등을 강조하여 제목의 설정 이유를 알게 하고, 에필로그까지 부제로 플랫부쉬 애비뉴라고 달아 강조함으로써 매우 은유적, 포괄적 성격으로 제시된 경우이다.

 

작가의 무대에 대한 고려는 매우 섬세해, 무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제목의 은유정이 주는 폭넓은 의미와는 반대로, 첫 무대 설명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지나치게 테크닉하여, 연출· 관객의 상상력이나 독자의 문학적 상상력을 스스로 제한할 가능성이 많다. 이는 4장 거절에서 읽을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며 설명적인 - 마치 2인의 토론을 듣는 듯한 - 대사와 더불어 극을 편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프롤로그, 에필로그에서의 병렬적인 독백 - 남녀가 만나기 전과 다시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 이나 영어 대사의 기계적 변형, 검은 옷의 설정 등 비교적 참신한 시도들을 자칫 진부하게 만들기 쉽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여자의 캐릭터 구성과 극 속에서의 힘이 비교적 약하고, 그녀의 사고와 행동 사이에서 쉽게 모순을 느낄 수 있다

우선, 4장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꿈 따위를 기다리고 있는무모함에 대한 지적에 어떤 설득력 있는 대답도 발견할 수 없다. 게다가 만들어진 꿈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지신이 비틀어지는 것을 못 본 척하느니 몸을 파는 게 낫다는 논리는, 돈을 위해 생산되는 세계를 증오하는 그녀가, 극중 유일한 행위로써 돈을 요구하며 몸을 내맡기는 것과 대비해 볼 때, 후기산업사회의 난점과 그녀의 이상을 구별하기 어렵게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찾다가 희생되어 버린 한 여인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검은 옷의 행위가 더욱 그로테스크하고 남자의 사회로의 영합이 허망한 방향으로 - 또는 좌절되거나 - 제시되지 않는 한 마지막 장면, “화면 속의 여지는 웃고 있다.’는 아무런 공감 - 비련감, 조소 또는 승리감 등- 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극의 대공간은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 3장 비밀과 5장 대가는 제외되었으나- 모니터 화면에 자막으로 처리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서울, 1989’, ‘뉴욕, 1991’뉴욕, 1992'는 여자를 위해, ’서울, 1993'은 남자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둘은 줄곧 한마디씩 독백을 하고 있어 그들이 있는 시· 공간이 착각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화면에 뉴욕‘ 1992' 가 나타난 후 남자는 내가 떠나면 어머닌 그나마 적적해하시겠지라 말함으로써 그곳이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프롤로그 끝까지 둘은 나눠진 모니터를 통해서 따로 보여 져야 하겠다. 모니터를 이용한 이 시도를 3장과 5장에서 슬그머니 삭제할 것이 아니라 작7까 원하는 장소와 시점으로 - 추상적이건 파격적이건 간에-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플랫부쉬 애비뉴에 소개된 수많은 시· 청각적인 요소들이나 극의 구성 등 참신한 점이 엿보이나 작가는 보다 과감한 시도를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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