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루쥔 '여름의 기억'

clint 2019. 6. 29. 08:00

 

 

 

<여름의 기억(夏天的記憶)>2007년 제3회 아시아 연극연출가 워크숍의 초청으로, 중국 텐진 인민예술극원의 뛰어난 감성을 지닌 작가 겸 연출가 왕레이(王磊)가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을 통해 공연했던 작품이다. 한 신문에 시골에서 광저우로 올라와 돈을 번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가난한 시골 출신 학생을 고용하여 청부 이혼을 도모하다 살해한 사건 기사가 났다. 상해희극학원 극작과 교수 루쥔(陸軍)이 이를 보고 느낀 바 있어 희곡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현실 소재로부터 꾸준히 희곡을 창작해온 루쥔 교수의 45번째 희곡이라 한다. 그 후 이 작품은 왕레이의 섬세한 정리와 연출을 거쳐 캐릭터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단순한 중국의 시사 뉴스로부터 인성의 무대로 심화되어 크게 주목 받게 되었고, 그 후 서울 무대에서 한국 관객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작품 번역을 맡아 가까이에서 왕레이 연출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며 그 섬세한 감수성과 배우의 신체 에너지를 끌어내는 능력에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3회를 맞은 아시아연극연출가워크숍은 2005년 당시 한국연출가협회 심재찬 회장께서 시작하여, 중국 쪽에서는 1회에 중국 국가화극원의 연출가 티엔친신이 참가하여 생사장을 공연했고, 2회에는 대만 금지연사(金技演社)의 왕릉위가 참가하여 나비 떼를 공연하였고, 3회에 중국 텐진 인민예술극원의 연출가 왕레이(王磊)가 참가하여 여름의 기억을 공연하였다. 그 후에도 장광텐, 사오저훼이, 왕충 등 중국의 대표적인 젊은 연출가들을 초청하여 우리 배우들과 함께 약 한 달간 작업하여 소극장공연을 올리는 프로젝트로 일정기간 지속되었다. 비록 열악한 조건에서 진행되었지만, 비교적 일찍 시작된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아시아 젊은 연출가 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다. 특히 초기에 왔던 티엔친신과 왕레이는 모두 전통극 훈련을 받은 배우출신으로, 배우의 신체와 에너지를 어떤 리듬과 형태로 무대공간에 담아내는지에 있어 중국 전통극의 방법론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연출가란 점에서 우리 배우들에게 매우 유익한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개혁 개방 이후 시장 경제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를 경험하게 된 중국인들은 금전만능의 가치관에 휩쓸리며 왜곡된 삶의 모습들을 노정하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번 남편 장얼마오가 탈세를 감추기 위해 이 사실을 아는 비서와 결혼하려고 시골에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사는 착한 아내 치우즈와 이혼하기 위한 계략을 짠다. 정당한 이혼사유를 만들기 위해 대학학비를 마련하려는 가난한 시골 청년 뤄샤오산을 끌어들여 아내의 불륜을 조장하는데, 처음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그의 아내에게 접근하여 목장의 말을 돌보게 된 청년이 점차 여인의 순수함에 끌려, 정말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공모를 알게 된 치우즈가 이혼장에 서명하고 그저 일회적인 사랑이었다는 말로 청년마저 떠나보낸 후, 자신도 아기를 낳자마자 아기를 데리고 목장을 떠나버린다. 헤어지기 전 뤄샤오산에게 요구하여 받은 아기의 이름이 바로 여름(夏天)이다. 청부 이혼 계략이 빚어낸 삼각관계로 인해 착한 아내가 희생양으로서 불행해지는 것이 멜로드라마의 흔한 결국이라면, 이 작품에서 이 흔한 스토리를 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당한 정신적 기품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은 여인의 자아발견과 홀로 서기의 의연함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 청년과 여인이 끌어가는 서사의 사이사이에, 계속 몇을 놓으려는 남편과 점차 갈등하게 되는 청년, 이 두 공모자의 대화가 배치되어 극을 끌어가는 또 한 축을 이룬다. 두 공모자가 어둠속에서 여인의 사적 공간을 엿보는 방식으로 불편함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러한 모의와 관찰의 산문적 구성에 북방 시골 목장을 배경으로 살아온 한 선한 영혼의 내면이 시적이 정감으로 펼쳐진다. 믿었던 남편의 배신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로부터, 새로 발견한 사랑이지만 그의 행복을 위해 그를 놓아 보내는 아픔까지,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여인에게 새로 주어진 생명의 축복(여름)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지극 정성으로 시모를 봉양한 것이 치우즈의 선한 품성과 함께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른 죄책감 때문이었다면, 아기의 출생으로 인해 그녀는 스스로를 옥죄었던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충만한 생의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또한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통해 생명감이 충만해짐으로써, 치우즈는 의연히 홀로 설 수 있게 된다. 오히려 그녀가 당당하게 자신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데 비해, 남편은 스스로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게 되며, 청년은 소중한 것을 잃은 아픔을 맛보게 된다. 청년이 지어준 이름대로 여름은 정적인 사랑의 기억이며 거기서 배태된 씨앗이자 열매였다. “개혁개방의 상처를 통한 자아발견을 깊은 인성의 드라마터지와 상징적 스테이징으로 인상 깊게 표현했다는 한 평론가의 언급처럼, 자칫 멜로드라마로 떨어질 수 있는 평범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상투적인 처리에 머무르지 않고 지정성에 기초한 문학적 처리를 통해 인성의 깊이를 섬세하게 표현해 냈다,

여름의 기억199910월 텐진인민예술극원에서의 초연에 이어, 20006월에는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소극장에서 공연되며, 그 현대적이고 참신한 공연형식으로 인해 베이징 무대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왕레이 연출은 특히 소극장 연극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관객이 배우의 호흡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직접적 교류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 최고 권위의 연출가상인 제7회 중국예술제 우수레퍼토리상, 우수연출기상을 수상하였고, 10회 문화상의 작품상, 연출상, 주연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당시 텐진, 베이징, 시안 등지에서 100회 이상 공연되었다.

 

 

 

 

이 연극은 개혁개방 이후의 시대가 배경이다. 남편은 그 흐름을 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고 아내는 시골에서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농장을 꾸려 나간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번 남편은 도시에서 비서와 살림을 차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아내는 거부한다. 할 수 없이 남편은 가난한 고학생에게 대학 등록금을 준다는 조건으로 청부 이혼을 시킨다. 줄거리에서 느껴지듯 연극은 시골/도시, 고학생/사업가, /사랑 이라는 대립구도를 설정해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각 주인공들의 가치관을 충돌 시키고 유혹하며 끝내 추락시킨다. 이 극의 포인트는 9살을 기준으로 운세가 변하는 아내의 목걸이, 도시로 떠난 남편이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오는 바람에서 매달아둔 붉은 깃발이다. 34살인 아내는 어렸을 적부터 나쁜 일을 막기 위해 목걸이를 지니고 지내왔다. 하지만 남편이 떠나려고 하자 9살 기준을 생각지 못하고 남편에게 목걸이를 주고 만다. 그리고 4년 뒤, 39살이 된 아내는 <여름날의 기억>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이것은 연극의 전체 줄거리를 암시하고 지배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여름날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필연적이었음을 상기 시킨다. ‘붉은 깃발은 극의 끝까지 희미한 조명을 받으면서 존재를 드러냈다. ‘붉은 깃발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도덕적 관념을 상징하면서 관객을 끊임없이 주시한다. 줄거리상의 포인트가 목걸이와 붉은 깃발이었다면, 전체를 아우르는 포인트는 인물의 배치와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던 밧줄, 그리고 오른쪽에 오두막처럼 생긴 공간이다. 주인공인 아내, 고학생, 남편이 차례대로 등장하면서 삼각구도를 이룬다. 이러한 배치는 관객의 시선에서 안정돼 보이고 균형 잡힌 무게를 느끼게 해줬다. 또한 오른쪽에 보이는 탁자와 의자는 남편의 공간으로서 고학생이 갈등을 할라치면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남편과 고학생은 관객을 향해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한다.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닌 관객을 향한 연기는 시골과 도시라는 물리적 거리감을 최소화 시키는데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음으로 고학생과 남편은 긴 밧줄로 아내의 몸에 밧줄을 묶고 밀고 당기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의 나약함을 표현했다. 또한 남편의 소유인 마구간에서 말이 새끼를 낳을 때 숭고한 잉태의 순간을 휘몰아치는 음향과 빨간 조명으로 표현했다. 그 속에서 고학생과 아내가 밧줄을 당기면서 자연의 이치에 빨려 들어가는 듯, 격렬한 몸짓으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그리고 서서히 둘의 감정이 무르익어 갈 때쯤 그들은 오른쪽 오두막에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의 몸짓으로 하나가 된다. 꽁꽁 묶어뒀던 밧줄은 아내의 손길로 하나씩 풀어지고 그들은 어느새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빨간 조명은 허락될 수 없는 사랑을 보호하려는 듯 서서히 옅어진다. 이 극에서는 특별한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다만 여름이라는 것을 상기 시키는 듯, 혹은 시대에 휘말린 인간들의 갈증을 표현하려는 듯 물소리를 자주 삽입했다. 아내가 고학생의 옷을 빨면서 자신의 몸에 물을 끼얹을 때 들리던 물소리는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대신하면서 성적 본능에 대한 욕망을 표현했다. 이 연극은 개혁개방을 맞아 구시대의 몰락으로 새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의 횡포가 결국 사랑 앞에서 무력해 진다는 교훈적 내용이다. 구시대는 시골에서 남편을 기다리기만 하는 여성이고, 새 시대는 돈이 인생의 최고라고 생각하는 남편이다. 또한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학생을 내세워 중립을 지키고 후에는 극의 교훈을 전달하려고 하는 작위적인 설정은 연극의 내용을 진부하게 느껴지게 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왕 레이가 선보인 강렬하고도 화려한 image는 줄거리가 가지는 진부함을 친절하게 감싸는데 충분했다. 오히려 image의 나열만으로도 줄거리를 짐작케 하고 극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있었다. image 덕분에 화려한 외출을 하게 된 <여름날의 기억>. 그리고 왕 레이. 잊고 싶지 않은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