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탬벌레인 제2부에서 탬벌레인이 제노크라테를 잃은 후 맏아들 칼리파스를 죽이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 것을 근거로, 비평가들 중에는 이 작품을 르네상스 비극의 시초로 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작품에 나타난 비극적 요소는 매우 피상적이다. 그는 결코 스스로를 배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제노크라테와의 이별도 육체적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인해 오히려 영원한 결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친구들 역시 끝까지 그를 향한 변함없는 충성과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으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삶은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분명히 영웅적이라고 할 만하다.
커닝햄(J. S. Cunningham)은 백과 흑, 자비와 운명 , 불과 물, 삶과 죽음, 조브신과 하데스, 천국과 지옥 같은 대립적인 요소들이 이 작품의 시각적, 언어적 수사를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소들은 단순한 대립을 넘어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면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탬벌레인과 그에게 대적하는 자들의 관계에서, 또한 탬벌레인과 제노크라테의 관계에서 대립적인 요소들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우리는 그것이 탬벌레인 자신의 두 얼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를 통해 드러나는 대립은 삶과 죽음의 대립으로 대변될 수 있다. 그의 용기와 위엄, 결단력 등은 우리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삶의 측면을 대변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의 정복욕과 잔인함은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상대적으로 죽음의 측면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처럼 「탬벌레인 대왕」에 나타나는 대립적인 요소들은 주로 성서적이고 기독교적인 패러다임과 고전 신화와 중세 기사도의 이상형을 섞어놓은 신화적 패러다임을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들은 교묘한 조화를 이루며 궁극적으로 탬벌레인의 영웅성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극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의 이름과 기독교의 신이 복합적으로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탬벌레인은 기독교의 옹호자이고 기독교 신의 대리인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그가 바로 신의 지위를 넘보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고전 신화 속의 조브 신과 다른 신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 상황을 고려해볼 때, 말로가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그는 성서적 패러다임과 고전 신화의 패러다임을 복합적으로 이용하여 르네상스인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탬벌레인은 유일한 하느님의 대리인이면서, 조브 신에게 비견될 만한 놀라운 운명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즉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이간의 영웅성을 부각시키는 기독교 전통과, 인간이 신과 경쟁하고 때로는 결혼하며 신에 버금가는 영웅이 탄생하기도 하는 고전 신화가 말로의 작품에서 복합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터 탬벌레인은 그가 도전하는 자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화려한 웅변보다는 왕다운 결단력에서 비롯된다. 그의 적들의 호언장담과 허풍스런 맹세가 아무런 결과도 없이 헛된 말로 끝나버리는 반면, 탬벌레인의 맹세와 장담은 필연적이라고 할 정도로 행동으로 연결된다. 그가 최초로 대적하는 페르시아의 왕 뮤세테스는 나약하고 결단력 없는 왕이다. 그는 동생 코스로에에게 조롱당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고, 모든 결정은 미앤더라는 신하에게 의존해서 내린다. 반면 탬벌레인은 결코 다른 이의 조언이나 지혜에 기대는 인물이 아니다. 마치 태양이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듯이, 탬벌레인은 어떠한 주저함이나 흔들림 없이 정해진 자신의 궤도를 따라간다. 사실 탬벌레인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이미 정해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은 전쟁에서 패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극의 초반에 그가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때로는 별들과 운명이고, 때로는 하지만 바빌론을 약탈한 후에 마호메트를 경멸하는 그의 행동은 신성 모독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 장면 이후에 곧이어 그가 죽는 것은 마호메트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왔다. 또한 그의 신이 사랑과 자비의 신이 아니라 보복적인 정의를 행하는 신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겨져 오기도 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언급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는 이교도 군주들에 대한 신의 분노이다. 특히 바빌론의 멸망에 대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성도들을 박해하는 폭군에 대한 정죄는 신약인 「요한계시록」의 절정을 이룬다. 바빌론은교 만과 포악의 도시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상숭배의 도시이다.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증오스럽게 여겨지는 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람들을 속인 거짓 선지자들이 유황불이 타오르는 불의 호수에 산 채로 던져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단순히 성적 또는 심미적 차원만이 아니라, 조화와 결합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탬벌레인과 그의 충직한 신하들, 그의 세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탬벌레인은 자신의 병사들 중의 가장 천한 자도 인도의 모든 보물보다 더 귀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테켈레스, 우섬카사네, 테리다마스는 탬벌레인과 참으로 이상적인 군주와 신하, 사랑하는 친구로서의 관계를 보여준다. 탬벌레인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인정하고, 자신의 영광을 친구들과 함께 누리며 그들의 우정과 충성에 합당한 보상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탬벌레인의 사랑과 조화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인물이 바로 그의 맏아들 칼리파스이다. 탬벌레인이 칼리파스를 죽이는 것을 포로가 된 왕들은 야만적인 행위로 규정짓지만, 우리는 탬벌레인의 행위가 바로 조화와 통일을 깨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칼리파스가 보여주는 비겁함과 게으름, 음탕함은 바로 탬벌레인이 지향하는 영웅적 삶의 조화와 통일을 깨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칼리파스를 죽이는 것은 마치 그가 신의 대리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몰살시키는 것과 같이 자연과 신의 정의를 실현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탬벌레인의 정복욕이 단순한 신의 응징 차원이 아니라, 정복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넘쳐나는 빛나는 보석과 진주들에 대한 열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는 분명히 종교적 차원의 응징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팽창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탬벌레인은 결코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팽창주의라는 주류 담론의 신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것은 탬벌레인의 존재 자체가 영웅적 이상의 추구라는 주류 담론을 손상시키는 회의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야심과 야만성은 우선 그가 양치기에서 페르시아의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양치기의 신분에서 왕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분명 당대의 신분 계급 질서를 전복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탬벌레인과 비교되는 페르시아의 왕들이 어리석고 무력하기 때문에, 신분 상승은 오히려 그의 영웅성을 부각시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코스로에와 힘을 합하여 나약하고 무능한 왕 뮤세테스를 몰아낸 탬벌레인이 곧이어 코스로에마저 배신하여 자신의 야심을 달성할 때, 우리는 그의 영웅성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테리다마스는 이러한 탬벌레인을 “위로 상승하지 않으려 하고, 군주다운 행동으로 최고의 지위 이상으로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자는 천박한 쓰레기 같은 자” (제1부 제2막 제7장)라고 주장하며 그의 야심을 옹호하지만, 이는 탬벌레인의 영웅성이 결코 당대 계급 질서의 이상적 가치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당대의 지배 담론을 실현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되어 있는 개인의 폭력적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 욕망대로 행하는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로가 탬벌레인의 영웅성이 지닌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패배를 모르는 탬벌레인의 승리와 정복은 그 이면에 야만성과 잔인함을 수반하고 있다. 그의 놀라운 승리는 환호와 함께 수많은 살육과 약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탬벌레인의 야만성과 잔인성은 그가 적국의 왕들이나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우선 그는 자신과 정정당당하게 싸운 터키의 황제 바자제스를 발판으로 사용하고, 그를 동물처럼 철창에 가두어 모멸감을 주는 야만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말로가 바자제스를 비굴한 황제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그의 부인 자비나는 비록 싸움에 졌지만 탬벌레인 앞에서 비굴하게 생명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기보다는 스스로 비참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탬벌레인의 야만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다마스쿠스의 처녀들을 잔인하게 죽여 그들의 목을 성벽에 걸어놓는 탬벌레인의 행위는 그의 잔인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말로는 탬벌레인이 실현하는 영웅적 이상의 경이로움을 묘사하면서도, 영웅주의에 가려진 야만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패배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면서 이방 국가들을 정복하는 탬벌레인이 대변하는 제국주의적 사고는 그 야만적 속성을 숨길 수 없다. 결국 탬벌레인이 보여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은 당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가치관이나 질서의 이면에 숨겨진 광기와 폭력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탬벌레인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계급 질서라는 지배 담론을 위반하여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과 햄을 파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신의 지위를 넘보는 반 기독교적인 ‘영웅’의 요소를 지닌 인물인 것이다. 탬벌레인은 유일한 하느님의 대리인이면서, 조브 신에게 비견할 만한 놀라운 운명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떠벌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영웅 신화는 기존 지배 담론의 욕망을 철저하게 충족시킴으로써 철저하게 위반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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