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동란의 시기에 열한 명의 참칭 황제가 등장한다. 수마로코프는 그중에서도 참칭자 드미트리 1세를 소재 삼아 역사 드라마를 완성했다. 18세기 러시아 고전극의 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참칭은 거짓 왕이나 거짓 정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참칭을 순전히 러시아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다른 어느 국가보다 러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칭 문제를 간과하고 러시아 역사를 기술할 수 없을 정도다. 역사학자 클류체프스키의 말에 따르면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출현한 이래 참칭은 국가의 만성 질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참칭 문제는 푸시킨, 고골을 비롯한 러시아 문학가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다. 18세기 러시아 문학을 이끈 수마로코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사 오트레피예프는 폴란드에서 세력을 규합해 자신을 죽은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며 러시아 황궁에 입성했다. 그러나 집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중 봉기 조짐이 보인다. 폭정 때문이다.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고 반란의 조짐은 점차 현실화해 가짜 드미트리를 압박한다. 슈이스키와 파르멘까지 반란에 가담하면서 그의 몰락은 더욱 분명해진다.

17세기 초 계속된 흉년으로 인한 혼란 속에 보리스 고두노프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증대될 당시 기적적인 구원으로 살아난 드미트리 왕자의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601년 이러한 소문을 이용해 폴란드에서 드미트리를 자처하는 자가 출현했다. 역사에서는 그를 참칭자 드미트리 1세, 가짜 드미트리 1세로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 역사에서 자신을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로 참칭한 자는 모두 세 사람이었는데 가짜 드미트리 1세는 그중 첫 번째 인물로 1605년 6월 러시아 왕위에 등극했다.
실제 드미트리 왕자는 1591년 5월 15일 칼로 목이 베어진 채 사망했다. 현재까지 그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모친 마리야 나가야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수하인 다닐 비탸곱스키와 니키타 카찰로프가 드미트리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우글리치에서 왕자의 사망 후 곧바로 바실리 슈이스키를 수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회는 수십 명의 목격자를 심문한 후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드미트리 왕자가 티치카(땅에 칼을 꽂는 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발작이 일어나 자신의 목을 찔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보리스 고두노프가 보낸 자객들이 왕자를 살해했으며, 왕자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계속 퍼져나갔다. 이러한 소문이 결국 참칭자 드미트리의 등장 배경이 되고 말았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참칭자 드미트리가 미하일 니키티치 로마노프(차르 미하일 로마노프의 숙부)의 측근으로 봉직했던 보그단 오트레피예프의 아들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고 보고 있다. 가문이 몰락한 후 그는 머리를 깎고 성직자가 되어 수도원들을 떠돌았고, 한때는 모스크바 추도프 사원에 머물며 총주교 이오바의 서기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리는 1601년 모스크바를 떠나 여러 곳을 방랑하다 폴란드로 갔다. 교양과 능란한 화술을 겸비했던 스무 살의 그리고리는 자신을 기적적인 구원으로 살아난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라고 밝히고, 부유한 고관 아담 비시네베츠키 공의 집에 머물렀다. 17세기 초 혼란한 상황 속에 그의 등장은 보리스 고두노프에 반대했던 다수의 러시아 귀족들, 러시아에 눈독을 들이던 폴란드 국왕과 대지주 귀족, 그리고 가톨릭교회 등 많은 이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참칭자(僭稱者) 드미트리를 이반 4세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603년 ~ 1604년 폴란드에서는 그를 러시아의 차르에 등극시키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참칭자 드미트리는 러시아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폴란드 왕 시기즈문드 3세를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폴란드에 스몰렌스크와 러시아 북방 지역의 영토를 넘겨주기로 했다.
참칭자 드미트리는 1604년 10월 폴란드와 카자크군, 그리고 외국 용병으로 구성된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드네프르 강을 건넜다. 그는 러시아군에게 두 번의 대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빠르게 전열을 복구하여 남부와 남서부 지역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군 내부에 동요가 일어났고 투항자의 수가 늘어났다.

잇따른 비보로 인한 충격 속에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는 1605년 4월 13일 사망했다. 공식적인 후계자인 표도르 2세 고두노프에 대한 충성 서약식이 거행되었으나 러시아 군대는 참칭자의 진영으로 투항했다. 1605년 6월 1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의 폭동에 이어 6월 10일 벌어진 표도르 2세 고두노프 일가의 몰살 사건으로 고두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605년 6월 20일 참칭자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로 입성했고, 군중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참칭자 드미트리를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 왕자라고 공포했다. 이틀 전인 6월 18일 모스크바 근교 타이닌스크에서 이반 4세의 여섯 번째 부인이자 드미트리의 모친인 마리야 나가야가 운집한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칭자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이로써 참칭자 드미트리는 차르 드미트리 1세로 등극하게 되었다.
1605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통치 기간 동안 가짜 드미트리 1세는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모든 계층을 위한 정책들을 실현하고, 러시아와 정교회의 이익을 옹호해 나가고자 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대내적으로 보야르스카야 두마(귀족회의)와의 관계 정립, 귀족 기반의 통치 체제 확립, 농민문제 해결 등을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폴란드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폴란드 국왕에게 약속한 영토의 양도를 거부했고, 폴란드 용병과 대지주들에 대한 배상도 축소했다. 가톨릭 전파를 위한 러시아 영토 내의 교회 건립도 거부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러시아인들의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비 러시아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상인들의 자유로운 외국 왕래를 허가하고, 스스로 국민 계몽의 옹호자임을 표방하며 귀족들에게 자제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낼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가톨릭과 정교는 모두 기독교라고 말하며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는 토론과 음악 감상을 좋아했고, 식사 전 기도나 낮잠과 같은 러시아의 생활양식을 따르지 않았다. 17세기 초 러시아는 그와 같은 차르를 용인하지 못했다. 러시아인들, 특히 궁정 내 고위 귀족들과 정교 성직자들은 새로운 차르를 우려와 의혹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차르의 약혼녀 마리나 므니셰크가 2천 명의 폴란드 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의 오만한 태도와 가톨릭 교도인 마리나의 행동은 큰 충격을 주었다.
결혼식에서 마리나는 러시아정교 의식에 따르는 것과 러시아 의상을 입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바실리 슈이스키를 중심으로 차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결집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궁정 내의 기류와 폴란드로부터의 위협을 감지한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호위 무사들을 곁에 두었다. 이런 행동은 귀족 상층부를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606년 5월 17일 새벽, 마침내 바실리 슈이스키를 위시한 러시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차르의 칙령에 따라 크림한국 원정을 위해 모스크바에 집결한 군대가 여기에 가담했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2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크렘린의 차르를 습격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칼을 들고 반란군과 맞섰으나 짧은 격투 끝에 침실로 도망쳤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부상당한 차르는 반란군들의 칼에 의해 살해되었다.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주검은 사흘간 붉은 광장에 방치된 채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이후 시신은 불태워졌고, 그 유골은 대포로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되어 흩뿌려졌다. 마리나 므니셰크와 그녀의 부친은 체포되어 야로슬라블리로 추방되었다.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이어 바실리 슈이스키가 측근들에 의해 차르로 옹립되었다.

알렉산드르 수마로코프는 1717년 11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최초 전업 작가로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18세기 러시아 문학사에서 수마로코프는 고전주의를 정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드라마에서 영향을 받아 프랑스 연극 관례를 러시아 사극에 이식했다. 이로 인해 ‘북방의 라신’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북방의 라신’이나 ‘러시아의 볼테르’로 생각했고, 문학사가들은 그를 ‘러시아 연극의 아버지’로 간주했다. 당대 유명한 저널리스트 노비코프는 ≪러시아 작가에 대한 역사 사전의 시도≫에서 수마로코프의 작품이 “베르길리우스와 동급이며, 라신의 ≪페드르≫와 장 드 라퐁텐의 작품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대체로 해피엔드로 끝나는 수마로코프의 비극은 사랑과 의무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 반면, 희극은 무지와 지방적 편견에 대한 풍자였다.
기품 있는 귀족으로서 귀족의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부패한 관료와 농노제의 악폐를 폭로하는 잡지 ≪부지런한 꿀벌≫(1759)을 발간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에서 연출가(1756∼1761)로도 활동했다.
생전에 희극 수 편과 비극 9편을 남겼다. 비극 작품으로는 ≪호례프≫(1747), ≪햄릿≫(1748), ≪시노프와 트루보르≫(1750), ≪아리스톤나≫(1750), ≪세미라≫(1751), ≪야로폴크와 지미자≫(1758), ≪뱌체슬라프≫(1768), ≪참칭자 드미트리≫(1771), 그리고 ≪므스티슬라프≫(1774)가 있다. 모두 고전주의 비극을 모방했고, 연극의 삼일치법칙을 준수했다. 프랑스 고전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작품을 썼지만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은 러시아 역사의 자료에서 나왔다. 예카테리나 2세의 총애를 잃자 은퇴해 가난하게 살다 1777년 10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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