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 소유의 섬을 1년간 관리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구인신문 한쪽에 실린 짤막한 광고 한 줄이 두 사람을 외딴 섬으로 불러들였다. 마장동 1급 도축 정형사 ‘정태’와 잡일을 맡은 ‘수인’. 이들은 곧 자신이 맡은 일이 단순히 섬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어느 날 불법 포획한 고래가 섬으로 들어오고, 정태는 고래를 해체하고, 수인은 고래를 담는다. 둘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한다. 자신이 어떤 일에 발을 들였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2015 창작희곡공모전 대상을 받은 염지영 작 극단 누리에의 연극 ‘구멍 속 구멍’이 부산의 한 무대 위에 올랐다. 앙상블의 섬세한 몸짓, 객석까지 아우르는 무대 활용, 빔 프로젝터를 통해 실제로 튀어나온 것처럼 그려낸 고래까지. 연극이라는 장르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갖추었다. 강렬한 붉은 조명 아래 다방 아가씨 ‘주희’를 탐닉하는 정태, 그것을 보며 메스꺼움을 감추지 못하는 수인. 배에 신호를 보내라고 수인을 닦달하는 정태. 고래가 자신을 해치는 꿈을 꾸는 수인. 각각의 장면은 모두 의미가 있다. 상징성이 많은 작품인 만큼 관객은 이야기의 진행을 이해함과 동시에 함축된 의미까지 읽어내야 한다.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이 모든 것이다. 정태는 아주 날카로운 칼을 가졌다. 고래를 해체할 때는 날이 뼈에 스치는 촉감을 즐기며 구멍에 깊숙이 칼을 찔러 넣는다. 한편 수인 역시 위험한 칼을 가졌다. 구밀복검(口蜜腹劍). 혀라는 이름의 칼은 날카롭지는 않지만, 상대방을 깊숙이 파멸로 몰고 간다. “당신의 칼은 한 번 찌르고 말지만 내 칼은 온몸을 휘감죠”라는 대사는 수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칼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도구이자 인간성을 보여주는 등불이기도 하다. 또한, 보여주지 않은 것 역시 모든 것이다. 정태와 수인을 이 섬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자 실질적인 지배자 ‘영감’은 인물들의 대사에서만 등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지배의 본질은 실체도 없는 것에 순종할 때 드러난다. 결말 역시 뚜렷하지 않다. 섬을 두드리는 남자와 상자를 만드는 남자. 둘은 마치 성격이 바뀐듯하지만, 혹은 이들이 가진 인간성이 드러난 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살육은 멈추지 않는 걸까. 의붓아버지가 팔아넘긴 수인의 여동생은 희주였을까. 섬은 가라앉았을까. 혹은 가라앉지 않았을까. 물음표가 많이 남는 작품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말하고자하는 바는 모두 드러났다. 이해를 온전히 관객의 몫에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고 난해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이야기의 구멍을 꿰뚫고, 그 안을 헤집어 ‘구멍 속 구멍’을 찾아낼 가치가 있는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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