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윤택 '혜경궁 홍씨'

clint 2018. 11. 9. 12:01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성대한 진찬례를 준비한다. 

혜경궁은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정조는 그 진찬례를 빌어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겠다고 선포한다. 

화려한 진찬례가 펼쳐지는 가운데, 홀연히 사도세자의 혼령이 나타난다. 
그날 밤 혜경궁의 처소로 사도세자를 비롯헤 영조, 궁궐사람들, 아버지 홍봉한 등

지난 세월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온 혜경궁은 20년만에 만난 

여동생과 해후하고, 마침 혜경궁에게 밤문안 온 정조에게 혜경궁은 

친정의 한을 풀어주지 않는다고 역정을 낸다. 
다음 날 아침. 정갈한 차림의 혜경궁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 쓰고 있다. 종이가 펄럭인다.

 

 

 

혜경궁 홍씨는 인생의 온갖 풍상을 겪은 후에도 끝끝내 희로애락과 사랑, 욕망, 부끄러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늘 주변인의 위치에서 서성거렸다. 작가는 한중록특유의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과 궁중문학의 아취가 배어있는 전아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버리는 대신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충실한 가장 적나라하고 솔직한 희곡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인간이기 전에 짐승이라는 것 인간이 짐승의 본능을 품고 있음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자각할 때만이 인간은 비로소 짐승의 족쇄에서 벗어나 훨씬 더 인간다운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혜경궁이 자신의 아들인 정조에게 퍼붓는 부르짖음처럼 인륜을 벗어난 법령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괴물이나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일인 듯도 싶다.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 범하는 우가 있다. 거시적으로 역사를 쫓아가다가, 당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미시적인 삶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를 접하는 대중과 공감대 형성에 실패한다. 작품 속 인물들의 내밀한 사정을 알리고 교감할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 '혜경궁 홍씨'는 역사 소재물이지만,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다. 영조(1694~1776)의 며느리이자 그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1735~1762)의 부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1752~1800)의 생모이기도 한 혜경궁 홍씨(1735~1815)의 감춰진 삶을 드러내 보인다. 혜경궁 홍씨는 10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돼 궁으로 들어온 뒤 81세에 생을 마감했다. 작가 겸 연출을 맡은 이윤택은 혜경궁 홍씨가 끔찍한 세월을 감내하면서도 궁에서 천수를 다한 근원과 힘의 원천은 그녀의 비밀스러운 글쓰기인 '한중록' 집필이었다고 봤다. 이에 연극은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 따라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 극본에 기반 한다

 

  

 

 

 

혜경궁 홍씨에게 가문과 세자빈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번번이 과거에 낙방했으나 딸이 세자빈에 간택되면서 영의정에 오른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과 영조, 사도세자 사이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남편이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뒤주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지어미이자 어머니, ,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약한 여인일 뿐이었다. 당시 역사의 가장 큰 희생양이기도 했다. 10대 시절에 동갑인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가 피부병을 앓고 있는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며 친구 같은 부부로 발전하는 장면은 이들의 암울한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큰 안타까움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열리는 진찬례에 사도세자의 귀신이 찾아오면서 그녀는 다홍치마를 입고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 연출의 인장과도 같은 씻김굿이 등장한다. 사도제자를 비롯해 눈이 먼 영조 등 그간 그녀에게 아픔을 준 뒤 사망한 인물들의 귀신들이 모여 한바탕 춤을 추고 굿을 한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극은 삶의 풍파를 연약한 온몸으로 견뎌온 여성에게 그렇게 예를 표한다. 개인을 통해 역사의 아픔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묘를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