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에서 세상이 나타난다. 다시 어두워진다. 세상이 다시 나타난다.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내레이션 속 인물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윤주의 친구인 동지, 청명, 신정, 상강, 이렇게 네 명의 여자가 거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훌쩍거리고 있다. 윤주의 이모이자 트랜스젠더인 말복이 수선화를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네 명의 여자들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각자의 상처들이 드러나고, 서로 갈등하는 도중 윤주의 부재가 드러난다. 윤주의 제삿날이라는 것도 밝혀진다. 윤주의 죽음이 말복의 탓이라고 원망하는 신정에게 말복은 윤주의 비밀을 밝힌다. 내레이션 속 인물은 자신의 이름이 윤주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기억해낸다. 그리고 초인종이 울리고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이해성은 깊은 슬픔을 논한다. 이해성은 의도된 감상주의를 표방한다. 남자인 이해성이 여자들의 끝없는 수다를 써내려간다.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망각(Oblivion). 그 선율이 대사를 통해 가슴에 꽂힌다. 그러나 이해성은 달라진 게 없다.
“어찌 보면 제 작품의 색깔은 똑같아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이야기들을 다뤘지만, 사실은 그 밑에 깔려있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니까요.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어요. 사회적인 이슈를 이야기했던 것은,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가슴 아프고 눈에 밟혀서 쓴 거였고요. 북한군에 대한 이야기도,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도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고통 받는지 생각해보자는 거였죠. 제 연극은 결국 모든 사람들이 왜 고통 받는지에 대해 함께 사유하자는 이야기를 건네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지다> 역시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그 고통을 유발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단순히 여자들의 얘기도 아니고, 말복과 같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너와 나,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정상과 비정상, 사랑과 욕망을 가르고 있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경계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기에, 이성적인 관조보다는 “슬픔”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것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경계의 입구가 곧 “슬픔”이다. 정서적인 깊은 슬픔. 그 슬픔을 통과하는 순간 보다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경계가 풀린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고, 고통에서 해방된다.

'사라지다'의 경우 배역이 남성이었다가 여성으로 성 전환한 말복을 포함, 전부 여자다. 남자 역이 한명 있지만 그는 아무 대사도 없고 마지막 장면에 3분 동안 조각처럼 무대 한 편에 수선화를 들고 서있을 뿐이다. 움직임은 정적이고,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묘사하는 대사들이 많다. '사라지다'는 어느 날 한 아파트 거실에 모인 30대 중반 여성들의 대화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들 또래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는 얘기라는 인상을 준다. 또 작품 속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동창생들의 수다로 가볍게 시작되는 '사라지다'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 결혼과 이혼의 경계, 행복과 우울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거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떠도는 죽은 동창생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처음에는 신정· 청명· 동지· 상강 등 학교 동기동창생들과 이들이 이모라고 하는 트랜스젠더 말복이 왜 아파트의 거실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게 됐는지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러나 점차 조각난 대사들이 한데로 합쳐지면서 이들이 절친했던 친구 윤주의 1주기를 맞아 제사를 지내러 윤주를 아꼈던 이모 집에 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모와 네 친구 각자의 아픔이 표면화된다.
"미진아빠 재혼한대. 재혼하고 미진이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 간다네. 몇 달 전에 술 먹고 찾아왔더라. 자기를 용서해달라면서 막 울더라. 근데 이 인간이 마구 파고드는 거야. 나도 모르게 같이 자 버렸어. 인생이 이렇게 구질구질한지 몰라. 내가 정말 시궁창 같아. 근데...지금까지 생리를 안 해." 의사인 상강의 대사다. 말복이 트랜스젠더가 되면서 겪게 된 고통도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런 장면들을 곧바로 웃음으로 묻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3분의 2 정도까지는 진지함 반, 웃음 반으로 장면들이 빠른 속도로 넘어간다. 그 나이의 동창생들이 만나면 흔히 나누게 되는 섹스 이야기와 몰래 친구들의 아픔을 이모에게 전해주는 청명의 행동과 그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이 웃음을 유발하며 다음 장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죽은 윤주, 또 윤주의 주변 인물들로 화제가 옮겨 가면서 분위기는 급전직하한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신정과 윤주의 관계도 드러난다.

'사라지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마이크를 통해 무대를 채우는 죽은 윤주의 내레이션이다. 그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친구들의 대사 사이에서 자신의 아픔과 존재 이유, 삶과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낸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의 내레이션은 동창생들의 수다가 이어지면서 자칫 지나치게 가벼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이윤주. 내 이름이 윤주구나. 거리를 마냥 걷기만 했어. 눈이 쏟아질 듯 하늘은 찌푸려 있고, 욕정이 발기하듯 초라한 가로등 불빛들이 부풀어 올랐지. 한 해의 끄트머리. 아련함과 설렘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지러웠어. 네온사인의 글자들과 생각들이 얽히기 시작했어. 나는 누구인가." 이런 류의 독백들이 조용히 무대를 채우면서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극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 영상, 그리고 같은 장면에서도 수시로 변하는 조명의 색깔이 아파트 거실의 적막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30대 중반 여자들의 심리를 대사를 통해 매우 섬세하고 재치 있게 표현해낸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말목, 신정, 윤주 등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정말 '비정상적'인지 묻는다. 말복을 포함, 살아있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24절기의 명칭 중에서 따온 것도 흥미롭다.

이해성은 극단 고래의 대표, 작가 겸 연출가다.
2008년 백수광부 정기공연 <고래>作/연출.2009년 백수광부 정기공연 <고래>作/연출[박근형 연출], 2011년 남산예술센터 시즌 개막작품 <살>作, 2012년 대학로예술극장 ‘봄 작가, 겨울무대’ <치유>연출, 2012년 남산예술센터 <사라지다>作/연출, 2013년 대학로예술극장 <빨간 시>作/연출, 2014년 대학로 자유소극장 <불령선인> 작 연출, 2015년 <불량청년> 작 연출, 2017년 광화문광장에 블랙텐트를 설치하고 <불량청년> 등을 공연했다. 수상경력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당선 <남편을 빌려드립니다>, 2007년 제10회 신작 희곡페스티벌 당선 <고래>, 2008년 밀양 연극제 희곡상 <고래>, 2008년 서울문화재단 창작활성화 사후지원금 선정 <고래>, 2009년 서울문화재단 젊은 예술가 지원 선정, 2010년 전국문예회관 연합회 주최 창작 팩토리 우수연극제작 지원 선정 <살> 2016년 <불량청년>으로 서울연극인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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