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수백 년 동안 반복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의 대상이 되어온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8세(1158∼1214)는 어느 아름다운 유대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이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국왕의 신하들은 그 젊은 유대여인을 살해한다. 이 사건은 수많은 담시, 소설, 드라마, 산문들의 소재가 되었다. 그릴파르처는 이미 1809년에 프랑스 작가 자크 가조트의 소설 『아름다운 유대 여인 라헬』을 읽었다. 그는 1816년에는 주안 마리아나의 『스페인의 일반역사』에서 이 사랑 이야기를 국가 정치적 의미를 띤 것으로 새롭게 마주한다. 그릴파르처는 무엇보다도 이 소재로 드라마 『왕들의 평화와 톨레도의 주디아』(1616)를 쓴 스페인의 극작가 로페 드 베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드라마의 내용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민중봉기까지 불러온 1847년 바이에른왕국의 국왕루트비히 1세와 아일랜드의 무희 로라 몬테즈 사이의 연애사건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릴파르처는 일찍이 1824년에 이 희곡을 구상했다. 그러나 1850년대에 가서야 마무리했다. 『톨레도의 유대 여인』은 그의 생전에는 공연되지 못한 드라마에 속한다. 희극 『거짓말하는 자에 저주를』(1838)의 흥행 실패 이후 그는 크게 상심하고 실망하여 더 이상 어떤 작품도 무대에 올리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톨레도의 유대 여인』은 그릴파르처가 죽은 직후인 1872년에 가서야 보잘것없는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오늘날 유력한 연극 비평가들과 학자들은 「톨레도의 유대 여인』이 독일어권 연극문학이 제공한 최고의 작품에 속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내용상의 시의성과 언어적 우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재주꾼 그릴파르처가 탄탄한 구성과 드라마적 기교에 의해 가능케 한 무대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품은 뛰어난 만큼 마찬가지로 뛰어난 연출가와 함께 직간접적 암시들과 상징적 공간 및 도구들로 된 지적인 텍스트구조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훌륭한 배우들을 필요로 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1791∼1872)가 30년 가까이 구상하여 말년에 완성함으로써 그의 최후 작품으로 기록되는 『톨레도의 유대여인』은 12세기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에서 있었던 국왕과 유대인 소녀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5막의 역사비극이다.
청순하고 당돌한 유대인 소녀 라헬은 어느 날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 있는 왕궁 정원에 들어가 국왕 부부를 깜짝 놀라게 한다. 왕비 레오노르는 그녀의 막무가내적인 오만불손한 태도에 역겨워하지만 알폰소 국왕은 낯선 이교도 소녀의 열정적 모습에 매료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왕은 유대 소녀 라헬의 애교와 매력에 점점 더 깊이 빨려든다. 카스티야 왕국이 외적인 무어족의 위협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시점에 국왕은 유대인 소녀와의 사랑에 빠져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망각한다. 국왕 대신 국사를 떠맡은 왕비와 국왕의 봉신들은 유대인 소녀를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장본인으로 규정하고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라헬이 처참하게 살해된 후 국왕은 비로소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와 적과의 전투에 나서며, 다시 통치자로서 자신의 본래 의무를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이야기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이 작품은 국왕과 왕비와 유대소녀 사이의 애증과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무언가를 더 끼워 넣거나 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긴밀한 언어표현과 탄탄한 구성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하여 일부 비평가들은 『톨레도의 유대 여인』을 독일어권 최고의 드라마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없는 낯선 작품으로 머물고 있다. 이 드라마를 쓴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그릴파르처 또한 독일 사실주의의 전초인 비더마이어 (Biedermeier)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오스트리아의 국민작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편이다.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는 1791년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생애의 대부분을 공직에서 보냈다. 1814년 국세청의 세무사로 시작해 1818년 재무부의 사무관, 그 뒤 재무부 문서국의 국장이 되었으나, 더 이상 승진이 되지 않자 1856년 은퇴했다. 평생 스스로와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흔들리면서 이반과 분열의 고통을 겪었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과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생 동안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스스로를 분석한 자기관찰 자였다. 그로 인해 자기혐오에 빠진 그릴파르처는 남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 사랑의 힘을 평가 절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소외당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그릴파르처에게 사랑은 어두운 숙명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그런 그에게 삶의 구원은 문학과 음악이었다. 최고의 진리는 문학예술이었고, 어두운 삶과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역시 문학예술이었다. 우연의 연속이고 일관성 없으며 그림자처럼 허망하기만 한 삶으로부터 예술로 도피한 것이다. 예술은 그에게 삶이 거부한 것을 충족시켜 주고 보상해 주었다. 예술가는 삶에서 분리되어 고독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릴파르처는 삶을 희생한 채 문학 창작에만 온 힘을 쏟았다. 주로 그리스 전설(傳說)이나 사실(史實)을 제재로 비극과 사극을 썼으며 대표작으로는 [사포(Sappho)]와 [금 양모피] 등이 있다. 1872년 1월 21일 빈에서 81세로 숨을 거두고 슈베르트 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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