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근형 '빨간 버스'

clint 2018. 8. 11. 08:17

 

 

 

 

무대는 사거리 횡단보도의 한복판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흰색으로 빗금이 그어진 횡단보도 위에 교실이, 공터가, 술집이 겹쳐진다. <빨간 버스>를 탄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편하지가 않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장소가 겹쳐져도 결국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거리 횡단보도다. 게다가 건널 수가 없다. 신호등이 달려있지만 좀처럼 초록불은 켜지지 않는다. 빨간불과 노란색 불만이 번갈아 깜빡인다. 건너갈 수 없다는 신호 앞에서 아이들은 살아간다. 여기에는 나무 의자 몇 개만 있다. 나무의자 여러 개를 연이어 호프집 테이블이나 공터의 벤치를 만들고 따로 떨어뜨려서 교실이나 교무실의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무대 안쪽에는 회색빛 칠판이 두 개 서있다. 공연의 후반에 칠판은 딱 한번 문이 되어 열린다. 그 딱 한번이 리틀맘 세진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연극은 배우들의 노래로 시작한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추운 밤에 고양이들이 엄마를 찾아다니며 운다. ‘무섭게 눈을 뜬차들을 보면서 고양이들은 그리고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그런데 불안은 친구란다. <빨간 버스>는 불안을 친구로 삼은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은 빗을 휴대하고 다니며 머리를 빗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교복치마 속으로 바지를 끌어올려 옷을 갈아입고 거친 말로 우정을 확인한다. 그러다가도 자기의 비밀이 거론될라치면 정색한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횡단보도가 더 길고 멀어지는 것만 같다. 세진이 동원에게 던진 이 말은 아이들이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핵폭탄이다. 세진이는 강원도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한 후 아이를 낳았고 인터넷에서 혼자 아이 낳는 법을 찾아 정말 그렇게 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빨간 버스>는 어른이 되지 못해 비겁해져버린 어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진의 엄마는 세진에게 아이 아빠가 누구냐고 묻는다. 다들 힘들다고, 어른도 힘들다고, 너만 힘든 거 아니라면서. 또 고2는 어리다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세진의 곁에 있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기를 낳으며 엄마를 간절하게 생각했다는 세진의 독백은 절절해진다. 세진이 세진 앞에서 세진을 이야기한다. (엄마, , 아기의 이름이 같다) 같은 이름이라는 건, 마치 같은 운명이라는 걸 말하는 것 같아 섬뜩하다. 이럴 때 작가 박근형은 얄궂다. 세진과 엄마의 장면이 다소 길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극장이 세진에게 말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빛으로 구획 지어진 사각형 안에서 세진이 교복 조끼를 벗어 그것을 아기로 삼아 안는다. 아기를 향한 애정의 반대편엔 자신의 엄마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상상이 있다. 애증의 관계 아래 마음의 상처가 깊다. <빨간 버스> 그리고 빨간 엄마의 얼굴이다  

선생님들은 또 어떤가. 회색빛 칠판에 수학공식이나 윤리 명제를 적으며 수업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자기 딸을 향한 관심만 피력하거나,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교육현장의 부조리함을 꼬집고, 학생들에게 관심 있는 척 하지만 무기력하다. 이 모든 것에 그들 스스로 별표를 친다. 합창반을 담당하는 음악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지만 세진에게 폭력적인 사랑 고백을 하는 스토커다. 선생님들을 연기한 강지은, 이은희 배우의 화법에 경쾌한 리듬이 배어 있어 관객들은 여러 번 웃는다.

 

 

 

 

 

 

두 배우뿐만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은 경쾌한 리듬으로 속도감 있게 말한다. 사실 말의 내용은 무거운데 발화하는 방식은 무심한 듯 또 경쾌해서 그 간극이 묘한 울림을 준다. 그것은 <빨간 버스>의 파도 혹은 파동이다. 보는 이도 그 리듬을 탄다. 길 위에서 아이들은 오로지 말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가 있고 그 말들엔 일상에서 듣지 못했던 그들의 영혼이 담겨있다. 어두운 그림자 안에 머물던 목소리들이 극장에서 몸을 얻은 것만 같다. 막간마다 애잔한 정서의 음악이 흘러나와 공연 전체의 분위기와 리듬을 잡기도 한다. 운동으로 대학을 가려고 여러 종목을 전전하는 동원이 농구공을 튀기거나 자전거를 타고 원을 그리는 움직임도 공연에 리듬을 만든다. 공부 잘 하는 형과 오토바이를 타다가 일부러 형을 떨어뜨렸다고 고백하는 동원. <빨간 버스>는 인물들 내면의 죄책감이나 상처를 공연의 리듬으로 외면화한다. 동원의 죄책감이 농구공이 되어 바닥을 치는 식이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박근형이 청소년 극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박근형은 어둡고 청소년 극은 밝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거다. <빨간 버스>는 어둡고 동시에 솔직한, 신랄한 청소년 극이다. 우선 이런 질문부터 꺼내들게 한다. 아이를 가지거나 낳으면 학교에선 자퇴밖에 길이 없는 걸까? 옆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학교가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라며 속삭인다. 세진은 엄마에게 마지막 부탁이라며 고등학교는 마칠 수 있게 학교에 잘 말해달라고 하지만 세진의 엄마는 그마저도 들어주지 못한다. 학교도 엄마도 길바닥의 찬 바람과 다를 바가 없다.

 

 

 

 

 

세진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유치원에 가기 위해 탔던 노란 버스에서 아직도 못 내리고 있는 거 아니냐고, 자신이 과연 내릴 수 있을지 자문하는 세진의 그 이야기에 아이 울음소리가 겹쳐 들린다. 아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곧이어 교실 문이 열리고 세진이 걸어 나간다. 왠지 자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차가 끼익 서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소름이 끼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제야 아이 울음소리가 불길한 전조였다고, 마치 꿈에서 아기가 울면 우환이 생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진의 죽음을 암시하는 소리였다고 머릿속에서 몇 초 전을 복귀시켰다. 세진의 현실이 그리고 미래가 꿈처럼 휘발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작가 박근형은 이래서 또 얄궂다. 왜 세진을 죽게 해야만 했을까. 세진은 죽어가면서관객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미소 어린 그 얼굴이 관객들의 시야에 들어옴으로써 학교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그 틈은 불편한 질문이 된다. 교통사고는 비유. 교실 밖의 세상은 돌연 세진에게 사회적 죽음의 문턱을 밟게 한다.

 

사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갈 때의 기분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어. 다만 유치원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집에서 떠난다는 해방감에 상쾌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 누구나 그렇듯 어렸을 땐 더 멀리 더 높이 가는 것을 원하니까.’

연극 <빨간 버스>는 유치원 노란버스가 우리를 가두고 미친 버스가 돼버리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한다. 극중의 고등학교 이름도 노란 고등학교였다. 노란버스는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빨간 버스로 깜빡인다. 무대 위 신호등처럼. 횡단보도는 중간에 끊기고 선생님도 학생들도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세진의 영정사진이 길 한복판에 멈춰 있다. 우리는 그곳을 건너온 걸까. 영영 횡단보도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