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근형 '아침드라마'

clint 2018. 8. 9. 13:04

 

 

 

 

연극에는 세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부모를 죽인 괴물을 찾아가 복수했으나 결국 죽은 괴물어미의 울음을 체험하므로 해소가 아닌 비극의 반복만이 남게 된 첫 번째 이야기는 배우의 입으로, 백화점 사장아들과 결혼해 눈 세 개 달린 아이를 낳은 후 불륜에 빠진 여자,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가던 중 쓰레기 청소차에 치어 죽게 된 남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설명과 함께 막간극으로 선보인다. 연극의 본문이라 할 수 있는 세 번째 상황은 이전의 이야기에서 보였던 상징과 포장이 없다. 오징어와 소주를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친구의 술안주는 사람만을 태우는 연쇄방화범과 사람을 치는 쓰레기 청소차다. 다양한 사고에 이어 어머니의 병세, 상계동이냐 상암동이냐의 사실 확인, 돌아가신 교장선생님, 아들의 청첩장까지 주고받았는데 알고 보니 서로 모르는 사람이다.

좀 황당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 위와 같은 일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상상보다 앞서가는 현실과 매일 씨름하는 우리에게 그까짓 일이야 별일이네, 웃으면 전부. 그러나 연극은 이 모호한 기억들을 반복 충돌시키며 확실한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이 전부인 공간으로 미련 없이 바꿔버린다. 살아있는 어머니는 2년 전에 방화범에 의해 죽었고 40년 전에 죽었다고 믿었던 아버지는 떡하니 살아 무릎고통을 호소하는데, 빌려준 돈 받으러 찾아간 죽은 교장의 딸은 오히려 돈을 내놓으라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관객은 당황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활에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준은 딱 거기, 모르는 사람과 합의된 착각 아래, 아는 체 하는 수위까지다.

 

 

 

 

 

이 작품에 반복 개입되는 것은 방화범의 불과 습관성 뺑소니(?) 쓰레기차다. 누군가 끊임없이 불을 내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현실과 비현실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공간 안에서 교차되며 일상을 뒤튼다.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지 못하고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종결되지 못하는 삶의 실체에는 무심하면서도 아침뉴스의 사건사고에 열심인 우리들은 결국 뉴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임을 외면한 채 아침드라마로 도피한다. 교장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너한테도 그런 일이 생길거야라는 친구의 가벼운 농담 식 발언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으며, 서로 보지 말자 선언하는 모녀를 두고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웃으며 서로에게 힘을 줍니다.’라고 설명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 해설자의 멘트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다. 아들이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관객은 웃는 동시에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 실컷 웃으며 연민이나 느끼고 앉아있을 때인가. 아버지가 보고도 그 불길의 어마어마함을 알지 못하듯 우리 역시 연극을 관람하면서도 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연극 아침드라마는 웃기다. 그 웃음이 한겨울에 얼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듯 날카롭고도 잔인한 이유는 유머의 근거가 인간의 결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옴짝달싹 못하는 남자의 머리 위로 불을 부르는 석유가 뿌려질 때, 그의 아내가 무심하게 말한다. “무심한 내 남편이 죽어가네요.” 그리고 다시, 아침이다. 이제 아침드라마를 볼 시간이 왔다.

 

 

 

 

 

너무 황당해하지 마라'. 박근형 작가 겸 연출의 신작 연극 '아침드라마'에 만약 부제가 있었다면 이렇게 붙었을 것 같다. 그의 전작으로,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던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를 패러디한 표현이다.

'아침드라마'는 작품의 성격상 '너무 놀라지 마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극의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은 완전히 틀리다. 그렇지만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 놀라지 마라'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맥락이 같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한 연극이라는 점에서다. 극의 내용이나 극중 장면 속에는 황당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많다.

극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송창식은 자신을 창식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2년 전 방화 살인사건으로 숨졌다. 4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기억하는 아버지는 다리가 편치 않을 뿐, 살아있다. 자신의 돈을 빌려간 교장선생님이 사고사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유족에게 채무해결을 요청하러 집을 찾아가지만 오히려 자신이 집을 담보로 엄청난 돈을 빌렸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은 아들의 결혼식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창식의 눈에는 주례 앞에 버젓이 서있는 아들과 며느리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결혼식 사회자는 영혼결혼식이라며 식순에 따라 죽은 신랑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갖겠다고 한다. 이어 아들은 하객 앞에서 얘기를 시작한다.

이 황당함은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아 숨져있는 아버지가 느닷없이 "둘째야! 내 말 안 들리냐? 나 좀 내려줘! 힘들어 죽겠다! 둘째야, 나 좀 봐!"라고 하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박근형 작가에게 이 작품의 제목인 아침드라마는 황당함과 같은 뜻이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 꺼풀을 걷어내고 살펴보면 아침드라마 못지않게 더 큰 막장드라마 같은 삶이 숨어 있다고 인식한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대사 중에는 "()심하면 다 죽는다."라는 말이 반복된다. 또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계층의 거짓과 위선의 이미지가 대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 진다. 제 자신의 일 이외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창식은 살해된다.

"너무 황당해 하지 마라. 그게 바로 우리가, 그리고 바로 당신이 사는 세상의 습이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침드라마'가 관객에게 주는 느낌이다.

박근형 연출의 전작들처럼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얘기하면서도 웃음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그 웃음을 통해 황당함은 더욱 가깝게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천으로 구두를 닦다가 천을 허벅지까지 올려 부비는 것이 성적 유혹을 의미하는 것 같은 표현방식도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우리 사회 안의 곪은 상처, 황당한 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논리가 경시된 듯한 대사와 장면들이 군데군데 있는 것이 부담스럽다. 각 장간의 연결고리가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영혼의 목소리를 통해 무심하게 살지 말라는 취지의 '직설적인 교훈'을 주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박근형 연출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 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 손질을 해 나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공연이 이어지면서 보다 짜여 진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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