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상 밭 고추는 왜>는 늙고 힘 빠진 ‘광자’와 ‘동교’를 배경으로 매우 현실적이며 동시에 문제적인 두 명의 인물을 충돌시킨다. 그 중 ‘현자’는 ‘여상 나와서 옆도 안 보고’ 살았고, 전화국 정년퇴직 후 재건축과 아파트 분양권 등 일종의 부동산사업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 중이다. 그리고 광자가 기르는 무농약 고추를 ‘스무 개씩, 백 개씩’ 따서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김포에서 가져온 거라며 나눠준다. 그러던 어느 날, 고추를 또 싹쓸이하듯 따다가 광자에게 들킨 현자는 오히려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온갖 심한 욕을 퍼부으며 광자를 기함하게 만들고, 충격을 받은 광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뒤 길거리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간다. 이제 가장 문제적이며 동시에 지극히 평범한, 33세 현태라는 인물이 본색을 드러낸다. 현태는 요구르트 배달하는 엄마와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형과 함께 살고 있으며, 단편 영화를 몇 편 찍은 적 있는 배우이다. 믿었던 선배로부터 포르노영화를 제안 받거나 단역으로 출연하기로 한 약속이 문자메시지 한통으로 취소되는 그들의 무례함에 분통 터뜨리던 그는 광자에 대한 현자의 폭력에 그야말로 분노가 폭발한다. 현태는 현자에게 ‘일종의 살인행위’를 저질렀다며 사과를 요구하지만, 현자는 약해빠졌기 때문에 쓰러진 거라며 조롱하고, 모친은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왜 답답한 걸 세상에 풀려 하냐고 핀잔한다. 마치 김수영의 시처럼, 거대한 폭력 앞에선 무력하지만, 누군가의 무례함에 대해선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는 것. 현실에서 우린 그런 사람을 ‘찌질하다’고 말하곤 한다.
어떤 각성을 거쳐 왔는지 알 순 없으나, 장우재 작가는 담론적 성격이 강했던 첫 제목 <에틱스 vs. 모럴스>를 <옥상 밭 고추는 왜>라는 전혀 다른 작품 같은 제목으로 바꾸었다. 제목 덕분일까, 이제 현자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현태의 ‘찌질한’ 공격은 극단적으로 치닫기 시작하고, 그저 낡은 단독빌라였던 이곳은 순식간에 마치 이 세계를 그대로 압축한 듯한 격전의 현장으로 변신한다. 개인과 집단, 양심과 욕망, 현실과 이상은 물론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기시감마저 들게 한다. 그렇다면 결국 현태는 승리했을까? 이 싸움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는 순간 실패는 예정된다. 작가는 오히려 더 찌질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모든 폭력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므로("The personal is political." Petra Kelly, 작가의 메모에서 재인용).

서울 변두리 한 빌라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을 다소 우화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축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로만 보기에는 불편한 소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집중해 재밌게 관람 할 수 있었던 것은 김광보 연출의 섬세함과 희극성, 배우들의 연기 아닌 일상같은 수수함이 배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아쉬운 것은 작가 의식의 비약과 과잉이 조금 절제됐으면 하는 점이다. 층간 소음으로 살인을 하는 시대에 옥상의 고추 하나로 마음이 상하고 버럭할 수도 있다. 빌라 주민 현태가 분노할 당위성도 있지만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피켓 시위를 하고, 이웃 주민 동교까지 나서 현자의 반려견을 빼앗는 행위는 극이라지만 편치 않다. 개인적인 분란이 집단으로 번지고 끝장을 봐야 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보는 느낌도 있다. 연극이 갈등 해소의 역할도 한다는데 이 연극은 점점 각박해지고 집단화 해가는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함까지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작가의 아이디어는 기발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따분하고 분통 터지는 인간 군상들에게 출구를 열어주는 것 같은 통쾌함이 있다. 문제를 사회적 정치적으로 풀기보다 순리적으로 풀어냈다면 멋진 블래코미디가 될 만한 소재다. 이 연극의 재미는 동네 할머니들, 개인택시 기사들, 시위꾼 같은 다양한 군상들의 표정을 읽고 찌질한 행동을 보는 것이다. 옥상의 고추밭을 위해 2층 무대를 쓴데다 3개의 빌라로 구분한 무대장치가 좀 복잡하긴 했지만 배우들의 다양한 캐릭터 설정으로 지루한 부분이 없다. 현자 역의 배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우리 이웃 어디쯤 있을 법한 억척스럽고 이기적인 아줌마상을 잘 표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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