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윤택 재창작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

clint 2018. 5. 12. 17:03

 

 

 

 

 

(1막/ 20년만의 재회)
그들이 찾아낸 그레첸의 현황은 비참하다. '발푸르기스'란 퇴폐 주점을 경영하는
마담으로 분한 그레첸. 처음에 파우스트는 꺼림칙하게 여기지만, 그레첸은 여전히
아름답고 예전 이미지를 고스란히 간직함을 느끼고 새삼스런 사랑의 제2라운드에
돌입한다. 메피스토는 젊은 여자 바니걸과 놀아나고, 그레첸의 젊은 애인 발렌틴이
폭력적으로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사랑을 방해한다.
여기서 그레첸은 자신의 젊은 애인 발렌틴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파우스트는 묘하게 진퇴양난의 악운에 빠진 꼴이 된다




(제2막/ 그리운 주막에서)
대학교수가 주점 마담과 통정 도중 마담의 젊은 내연관계를 맺고있는 남자가
살해되는 사건에 연루돠면서, 파우스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현실적
지위와 명예를 고려해 이 곤경을 벗어 나갈 것인가. 그러나, 메피스토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살인사건의 현장 증인으로 선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그레첸이
어떤 고난의 길을 걸어 왔는가를 알게 되고, 현실적 출세를 위해 그레첸을 버린
자신의 행태를 깊이 반성한다. 파우스트가 책 속으로 도주하고, 메피스토가 국외로
도주한 시절, 그레첸은 여성의 몸으로 감옥행-고문-유산-결혼 실패-화류계 인생의
험난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파우스트는 이 황폐해진 사랑과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구원의 길이 열린다. 이 구원의 심판은 지난 군부 30년 세월의 청산과 현재 무기력을
인식하고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시대정신일 것이다.

 

 

 

 

이 작품은 탈 이데올로기와 포스트 모던적 현실상황에 놓인 90년대 지금 이곳-무분멸한 대중 산업사회의 진입과 극도의 이기주의가 성행하는 풍토 속에서, 전면적 회의에 빠진 인문주의적 지식인의 자기반성을 위해 쓰여졌다. 괴테 원작 '파우스트'가 18세기 후반 사회적 격변기에 처한 유럽 사회의 혼란과 갈등, 새로운 사조의 등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면, 200년 후 한국사회에서 재구성되는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는 20세기 후반 가치 중심을 잃고 있는 지식사회의 혼돈과 무기력증, 새로운 문화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면서 쓰여진 것이다. 줄거리는 세 71학번 대학 동기생들이 24년이 지난 오늘 서울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사회 변혁운동에도 나서지 않고 착실하게 학문과 가정을 지켜온 현직 대학교수 파우스트는 90년대적 상황-압도적인 대중문화의 범람으로 더 이상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전면적 회의에 빠진다. 이때, 대학 동기 메피스토가 방문한다. 그는 학우들에게 변절자, 혹은 회색분자의 누명을 쓰고 미국으로 정신적 망명을 떠난 인물이다. 그들은 그리운 시절을 회상하면서, 한 매력적인 대학동기 그레첸의 안부를 서로 묻는다. 급기야, 이 권태로운 봄날을 박차고 나가 옛 사랑을 찾아 나선다.

 

 

 

 

 

작가의 말/ 동시대 삶의 구조로 끌어내려진 파우스트
파우스트를 다시 쓰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위기의식, 그리고 지금 세상에 대한 전면적 회의 때문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긴장이 와해되어 버린 90년대적 무기력증을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는 안간힘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십세기말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 여기 한국사회는 더 이상 고전적 의미의 인문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듯이 보인다. 지식은을 지식인 답게 존재케 하고 그 유용성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고전적 의미의 글쓰기 또한 엄청난 물량과 속도전으로 흘러 넘치는 대중사회의 유행어로 소모되던지, 소외된 섬으로 남아 그 고고함을 지킬 수 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아니라면, 들끓는 세상의 속됨과 난잡함 속에 자신을 던져 타락한 세계의 제물이 되는 자기해체의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대중산업사회 속의 글쓰기는 어떤 이유에서건 왜곡 변형 절충 타협의 자기모독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세속화는 비단 신문 기자 방송 작가 뿐만 아니라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희곡 또한 마찬가지 입장이다. 대중으로부터의 소외를 감수하는가, 아니면 대중의 볼꺼리를 위한 헌신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 어떤 제3의 예술적 대안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파우스트를 다시 쓰기로 마음 먹으면서, 작가가 방향을 잡는 것은 바로 이 제3의 연극적 대안이다. 고전 파우스트를 동시대 삶의 구조로 끌어 내리는 입장은 물론 오늘의 대중과 만나려는 의지이며, 애써 파우스트를 텍스트로 선택한 것은 덧없는 자기소모와 여흥성 볼꺼리에 탐닉하려는 오늘의 대중을 어떻게든 연극 속으로 끌어 당기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파우스트가 함유하고 있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자기분열증을 앓고 있는 지금 세상과 인간에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