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공연시 '기막힌 사내들'로 공연되기도 함
이 작품은 시카고의 폐품장을 배경으로 한다. 인물들은 1933년 백년간의 발전을 되돌아보고 이후 백년간의 업적을 내다보는 백년간의 발전을 전시하는 시카고 대 박람회의 파편더미에 둘러싸여 있다. 인물들은 물질적인 발전(그 산물은 폐품이나 단순한 골동품이 됐다)과 도덕적 후퇴를 병치시킴으로써 생기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고 있다. 분명히 사실적인 배경은 테네시 윌리엄즈의 극만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사실 마멧은 작품을 단순한 자연주의로 바꾸는 해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작품이 자연주의적인 극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아주 양식화된 극이다. 언어는 양식과 일치되어 있다. 리듬이 아주 엄격하다. 구조적으로 고전적이다. 이 작품은 2막으로 나누어져 있다. 24시간 안에 벌어지며 통일성에 집착한다. 이 작품의 어떤 점들은 잘못 인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욕설이 많다는 사실은 자유시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기 어렵게 한다. 극이 폐품장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은 이 작품을 생활의 지저분한 면을 묘사한 극단적으로 사실주의적인 극으로 오해하기가 더 쉽게 될 것이다. 이 세 사람들이 도둑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은 우리들에 관한 극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극작가가 인물이라는 전통적인 연극장치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인물과 배경은 관객이 자신의 경험으로 암호를 해독하는 비유를 제시한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교묘하게 설정된’극이며 고갈되었다고 그가 암시하는 사상이다. 세계 최초 공연인<글렌게리 글렌 로스>의 런던 공연 때의 해설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탐욕에 젖어있는 권력을 낳는 신화라고 설명했다. 정직한 사람은 속일 수 없다는 필즈(W.C. Fields)의 소견을 인용하여 그는<글렌게리 글렌 로스>와<아메리카 들소>, 즉 들소 머리가 들어있는 5전짜리 동전을 90달러에 산 사람을 강탈하려고 좀도둑들이 음모하는 극에서 마멧은 중심주제를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전에는 그 동전의 희소가치를 몰랐지만 90달러라는 구매가격조차도 동전의 가치를 틀림없이 축소해서 말한 것이라고 좀도둑들은 이제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요점은 도덕적으로 말해서 죄악이 자본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마멧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사람중 하나, 티치라는 정서적 균형이 깨진 편집증의 남자가 자유 기업을 ‘개인의 ... 자유...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뭣 같은 길로 들어가는 것... 이익을 낼 정당한 기회를 확보하기 위하여’라고 정의할 때, 그는 핵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도가 결코 오지 않듯이 게획된 범죄는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의 목표, 예전에 없어졌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이정표를 제공한다. 실제로 인물들은 서로 편집증적인 의심 그리고 접촉하려는 극단적 욕구사이에서 찢겨나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인물들은 일종의 가족집단을 형성한다. 폐품장 주인인 단은 아버지며, 티치는 아들이다. 정신적으로 손상을 입은 바비에게는 이복형이 된다. 그 관계의 어디엔가 욕구는 물론 참 애정이 있다. 그러나<아메리카 들소>의 세계에서 가치는 뒤집혀진다. 죄악은 기업으로, 도둑질은 국가의 이념을 확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계획된 범죄의 호나상세계에서 그들은 동반하여 의미와 신분을 갖는다. 오닐의<얼음장수 오다>의 인물들처럼 그들은 의미를 허용할 수 있는 허구 속에 자신을 투영한다. 우리는 <아메리카 들소>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마멧의 접근방법의 본질이다. 그에게 ‘생략하는 것은 ...철저한 속임수다.’ 이 작품은 일부분 근본적으로 단순화된 삶의 반영이며, 일련의 과격한 거부였다.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이 그 반응을 묘사하는 언어와 더불어 과격한 거부로써 억압받는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마멧의 희석된 사실주의의 양상이다. 우리는 인물들이 어디서 대학을 다녔느냐에 관해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에 필수적이지 않으면 말이다. 그 사실을 뺀다.... 아무리 성격을 극명하게 밝힌다해도, 행동이 없는 성격은 없다. 행동과 성격은 같은 것이다. 극중 인물이 근거없이 자신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자기 성격을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파티에서 어떤 인물이 자신에 대해 까닭없이 어떤 것을 드러낼 수 없다.
이 말이 핀터의 말처럼 들리지만 ‘핀터는 신진배우, 신진학자, 신진 작가로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절대적으로!’라고 마멧은 언질을 주었다.
겉보기에 이 극은 드러나는 범죄의 음모에 관한 작품이다. 도둑들은 무능하고 분명히 자신있게 시도하는 행동을 확실히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더 소극이 된다. 그들은 동전 수집가가 사는 아파트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금고를 어떻게 찾아내 열지, 심지어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 아파트에 보관돼 있다고 생각하는 등 동전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공범자가 가게로 오는 도중에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도착하지를 못한다. 그와는 달리 자신감에 넘쳐있는 단은 부적응자와 무능력자들을 조직적으로 규합한다. 티치는 자기의 의무와 용기를 과시하지만 늦게 도착한다. 아마도 그러한 용기가 시험대에 오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 범죄는 사회나 현실의 문제와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목적을 위한, 우의를 위한 욕구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들은 환상, 허구, 스토리를 창조함으로써 즉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철저히 알지 못하는 아파트에 대해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그런 일을 한다. 스토리 속에서 그들은 안정감과 생존감을 느낀다.
그러나 스토리의 특징적 요소를 벗어나면 위협적인 세계가 있다. 경찰차가 구역을 돌고 있는 동안 모든 제스처는 제스처에 숨겨진 위협을 찾기 위해 조사되지 않으면 안된다. 알 파치노가 뉴욕에서, 잭 셰퍼드가 런던에서 출연했을 때, 티치는 사소한 일에 지극히 민감하고 친절과 위협에 노이로제 환자처럼 조심하는 지극히 정신신경병자같은 인물이다. 모든 제스쳐는 과잉 해석이 된다. 티치가 보는 세계의 모형은 한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적나라한 경쟁의 세계이다. 생존은 가장 큰 필요이고, 삶은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를 추구하는 과정이 되기 때문에 티치는 자신을 변경개척자라고 생각한다. 범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재정적인 보상보다는 고객의 일시적 이익으로 생각되는 것에 대한 응징이다. 마멧의 말을 빌리면 이 극은 ‘미국의 기업윤리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과 다른 작품의 요지는 조직의 도덕은 개인의 도덕이 아니며, 단체의 도덕은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티치는 계획된 범죄를 ‘사업’으로 보며, 일반적인 금지사항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본다. 사실 그들이 바비라는 청년에게 배신당했을지도 모른다고 그가 의심할 때 바비를 심하게 구타하고 그 자신은 단에게 얻어맞는다. 들소의 도살 - 이 극의 중심적이면서 애매한 상징 -은 시카고 박람회에서 예찬받았던 미국의 발전에 거치적거렸던 인디언들을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정당한 사업활동이라고 상기하는 데는 미국의 이념에 대한 티치의 황당한 언급이 필요없다. 사실 시카고의 배경은 이 도시(쌓여 있는 폐품중 돼지 도살용 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전세계를 위한 돼지 도살자’) 자체가 사업(인디언들과의 교역)을 위해 건설됐다. 시카고는 마멧이 암시하듯이 다른 사람들이 사업을 범죄하고 자신의 범죄를 사업하한 알 카포네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서로 터놓고 가깝게 지내지만 이런 관계가 암시하는 친밀함을 부정하는 티치, 단, 바비는 미국의 가능성의 잔재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의미가 빠져나간 언어, 탐욕, 의심으로 왜곡되고 변질된 도덕․정치적인 이념을 상속받았다. 그들은 미국의 혁명적인 덕목의 수사법을 전개시키지만 실제로 그런 덕목을 부정한다. 사실 티치는 핀터의 인물처럼 어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고조되는 폭력의 물결을 개탄하면서 스스로 무장하여 살인적 공격, 즉 그가 무기를 ‘단지 방어용’으로 휴대하는 극에서 정치적 의미가 없지 않는 편집증적인 반응의 고삐를 풀어놓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미국의 기업 가치에 대한 사회적 비평서를 벗어나,<아메리카 들소>는 실패한 관계, 즉 접촉의 욕구가 접촉 회피만큼 실존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에 관한 극이다. 애정이 사업과 갈등할 때 배신되지만 단과 바비 사이에는 진실한 애정이 있다. 티치는 누구든 자신의 내면 생활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그가 느끼는 약점에 대한 의식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는 윌리 로만처럼 ‘지극히 사랑받고 싶어하는’ 큰 욕구가 있다. 바비 역시 극단적으로 애정을 갈구한다. 그러나 이극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 욕구가 행동과 결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참된 접촉에 필요한 개방을 완전히 허용할 수는 없다. 무언가가 자아 공동체의 구성원 의식을 파괴했다.
마멧의 대사는 단편적이고 그 구문은 파괴되어 있다. 인물들은 종종 불완전한 문장으로 대화하고 의미없는 말로 대체되고 경험에 직면하여 언어가 고갈되는 것을 본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대화가 어떻게 되는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미국인의 담론은 자연스럽게 약강5보격이 된다는 그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산문구성은 아주 의도적이다. 뉴욕의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극장의 배우시절 그는 리듬의 의미를 배웠다. 스타니슬랍스키로부터 그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어냈다. ‘리듬은 행동과 같은 것이다.... 말은 소리와 내용보다 더 큰 리듬으로 된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한다.’ 통속적인 산문을 단순히 복사한 것처럼 보이는 연극 대사가 절찬을 받지만 실제로 그는 언어를 조심스럽게 만들어낸다. 인물들의 언어에서 열리는 공간은 역시 그들의 삶에서도 열린다. 그들의 불완전한 언어는 불완전한 심리와 사회를 반영한다. 이것은 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회로서 사상과 감정은 사상과 감정이 추구하는 의사소통을 두려워하는 개인간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한다. 완전한 의사소통은 약점을 갖게된다. 따라서 약점에 대한 공포는 결국 소리에 대한 공포보다 더 커진다.
마멧의 인물들이 순식간에 쉽사리 바뀐다. 그래서 단은 사업을 ‘상식, 경험, 재능’으로 정의하다가 잠시후 사업을 ‘제 앞가림하는 사람’으로 다시 정의한다. 반대하는 어떤 사람에게 비속한 장광설을 쏟아낸 후 티치는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불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티치의 언어는 희극적인 점강법으로 공격적이 된다. 동업 공모자가 나타나지 않자 티치는 그 녀석이 ‘말채찍으로 얻어 맞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언어는 자멸하는 폐쇄적 체제다. 원인과 결과간의 불균형(적대적인 어조가 폭포처럼 쏟아내는 난폭한 그러나 본질적으로 의미없는 외설로 지향태도), 수사와 사실 간의 불균형(티치는 총을 휴대하는 결정을 예절에 대한 하찮은 어휘를 무심히 차용하여, ’나의 개인적인 일. 어리석은 개인적인 일‘이라고 한다)은 언어가 경험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 말과 의미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다. 아주 비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한 인물(바비)는 말이 없다. 그가 중요한 거짓말을 하지만(그가 아파트를 나설 때 계획하고 있는 강도짓의 대상물을 보아두었다고 단언한다) 단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그러한 행동이 나온다. 대개 대사는 짧은, 도발적인 표현, 단음절의 말, 단순한 질문, 단축된 진술로 구성되어 마치 생각이 계속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언어 표현이 방해받고 있는 맥락에서도 텍스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 내지 두 개의 담론만이 하나의 문장의 한도를 넘는다. 극중에서 단 한번 티치는 이름으로, 즉 애칭으로 불린다. 극도로 흥분해서 갑작스럽게 분출하는 폭력 다음에 계획이 허망하게 무너지기 때문에 그들만 서로 남게 된다. 티치는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해서 행동을 잊고, 그래서 그러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벗어난다. 그는 종이 봉지를 머리에 쓰고 ’난 여자같은 사내같애‘라고 하면서 일당의 두목 단에게 아첨의 표시를 보내는 짐승처럼 행동한다. 단은 극이 끝날 때 밥과 함께 있다. 어떤 제의는 완결됐다. 이때의 그림은 잠시 함께 자리한 아버지와 아들처럼 언어, 즉 개막장면의 반향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이러한 부조화를 낳았던 탐욕과 편집증에 의해 타락되지 않는 두 사람으로 구성돼 있다.
롤랑 바르뜨는 언어의 형식적 조리와는 아주 별개로 언어가 조성하는 ‘의미의 오싹한 느낌’에 대해 말한다.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허공을 떠돌아 다니는 말을 하는 베케트의 인물들이 내는 소리를 그런 것이라고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의미가 상실된 언어를 펼치지만 아주 명확하게 욕구, 상실 그리고 공포의식, 즉 방어적인 공격을 알리는 마멧의 인물들이 베케트의 소리를 낸다고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메리카 들소>는 1975년 11월 시카고의 굿맨 씨어터 극장에서 초현되고 15개월뒤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는데 존 새비지, 로버트 드볼, 케네스 맥밀란이 공연의 주역이었다. 극평은 마멧의 말대로 ‘뒤죽박죽’이었다. 작품의 언어, 빈약한 플롯, 뿌리의식이 없는 인물, 사회적 소외에 대한 혼란스러운 비유 때문에 비평가들은 당황하고 자신감을 잃었다. 마멧의 자연주의라고 생각했던 것을 붙들고, 비평가들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나온 메시지로서 그 작푸에 대해 반응했고, 작품의 확실성 때문에 아니면 언어의 확실성 때문에 작품을 칭찬도 하고 거부도 했다. 사실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이 극은 표면적인 정확성을 초월하여 인물과 언어를 압축한다. 또한 이 작품은 결정론적인 사회적 환경에 대한 설명서도 아니다. 마멧의 인물들이 자신이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환경, 운명, 또는 유전학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엉뚱한 일에서 공모를 꾀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상황을 조성했고 실제로 환상으로 전락한 신화를 실제적인,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황량한 삶의 비극성 표출.
- 민중극장의<아메리카 들소>들소는 이미 멸종되어 가는 동물이다. 들소로 연상되는 것은 광활한 미국의 들녘, 그것은 프론티어 정신이 살아 있던 개척시대의 저항과 응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제 들소는 보호구역 안에만 있다. 그 자연의 건강한 동물은 힘없이 마른 풀이나 뜯어먹는 온순한 패배자의 복종 자세를 연출한다. 자연 속에 본능이 있고 건강이 있었다면 이제 모든 것은 관리되고 보존될 따름이다.
우리의 삶도 보존되고 관리된다. 마치 골동품처럼, 혹은 들소처럼 보호구역 안에서 옛날의 꿈을 반추하는 삶은 얼마나 황폐한 것인가. 그러나 삶이 그렇게 메마른 것 인줄을 모르는 우리들은<아메리카 들소>의 고물상 주인처럼, 그의 건달 친구처럼, 혹은 가게의 심부름이나 해주는 약간 멍청한 젊은이처럼 그 삶 속에 바보스럽게 진지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사건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흔하디 흔한 우리의 일상이 미국 어느 하류층의 하루의 삶으로 던져져 있다. 무대는 진열대가 놓인 고물상 가게, 그리고 철제 테이블과 의자 셋, 동숭동의 바탕골소극장에는 쇠난간이 있고 이층으로 오르게 되어 있는 나선형 쇠계단이 있어서 무대 분위기를 마치 지하실처럼 보이고, 거기다 나무 궤짝들이 놓이고 밖을 내다보게 되어있는 작은 도어 등으로 해서 고물상 가게는 무슨 음모의 소굴처럼 을씨년스럽다. 그러니까 무슨 사건이 나올 것도 같고 우리들 관객은 아메리카 들소로 상징되는 거칠거나 맥없는 거인의 비극 같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사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을 일으키려는 사건만이 있다. 그리고 아메리카 들소도 동전에 응축된 들소에 지나지 않는다. 골동품 가치밖에 지나지 못한 들소 동전, 아메리카의 들소는 동전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고, 그 미국의 삶은 우리들 문명의 삶 그것으로 황량하게 드러누워 있다. 동전으로 둔갑한 아메리카 들소는 이제 골동품 값으로 매매된다. 우리의 황량한 삶이 쓰레기 같은 골동품 값에 지나지 않는다.
그 들소 동전이 꽤 값이 나가는 것을 알게 된 그들 일당이 동전 수집가의 집을 털기로 작정하고 실행하려는 과정이 말하자면<아메리카 들소>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과정이 고물상 주인 도니(최종원)와 그가 부리는 젊은이 보비(주용만), 그리고 도니의 친구인 티체(윤주상)가 벌이는 일상적인 대화, 그것들은 포커 놀이라든가 주변 식당의 간이음식, 여자들 그리고 마침내 돈 이야기들이다. 돈 이야기가 급기야 일확천금의 집털이로 번지고 아메리카 들소의 거친 성정이 그들 세 사람의 미국 서민층에 전이되는데 그들의 욕설로 범벅이 된 거친 대화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관리되는 들소의 천진함이라든가 순정(?) 같은 것이 느껴지는 까닭은 주제가 ‘들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연출(정진수)이 절제된 우리말 표현으로 미국식 건달들의 일상언어를 작가 데이빗 마메트(David Mamet)적인 통제와 계산으로 번역해 낸 탓인데, 연기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그만큼 통제와 계산이 치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물상 주변 인물 같은 하층민의 무지를 반증하고 의식이 지리멸렬함을 드러내는 언어 사용법과 욕설은 어쩌면 너무 세련된 느낌마저 주는데 의도적으로 억양을 높이고 격렬한 몸놀림을 보이는 연기는 원작이 갖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표현기법과 맞아떨어진다.
어떻게 보면 민중극장의<아메리카 들소>는 사실성이 현실 이상으로 두드러진 것이다. 어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실의 일면을 부각시키다 보면 그것은 과장된 현실처럼 보인다. ‘사실’을 보다 짙고 끈적끈적하게 보여서 몸서리쳐지는 현실인식으로 끌고 가는 하이퍼 리얼리즘 수법은 70년대 후반에 와서 두드러진 연극적 경향이었다. 얼른 보면 이른바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훨씬 밀도 있게 집약된 사건의 프로세스는 잔혹하고 잔인한 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슈퍼 리얼리즘 혹은 하이퍼 리얼리즘이라고 불려지는 그런 작품이나 연출수법이 이른바 부조리 연극이나 제의극의 육체언어 연극 다음에 탄생한 것은 현실인식에 보다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작가예술가의 성실성과 관련된다. 있는 사실로서의 현실을 연극무대에 내놓을 때 잔가지들을 쳐낸 다음의 ‘사실로서의 현실’은 잔혹하고 잔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퍼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나 연출가의 변이다.
<아메리카 들소>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보고 나서 미국의 현실이나 우리의 현실들을 그렇듯 불모의 것이면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일상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절망이나 허무주의를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 우리들 인간의 일상성 때문에 ‘절망’도 되지 않고 ‘허무주의’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이퍼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되바라진 의식이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의사 표명이고, 그런 까닭에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막판의 정직, 그래서 ‘불모의 건강’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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